예비교사로서 이태석 신부의 정신을 본받아....

 

“예수님이라면 이곳(수단)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학교, 내 집처럼 정이 넘치는 그런 학교 말이다.” 이는 이태석 신부가 살아생전 했던 말이다. 의사이자 신부였던 그가 교육을 강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태석 신부는 1962년 10월 17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허나 홀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열심히 공부했으며 뛰어난 학업 성적을 거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봉사와 배려를 강조하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데 이는 훗날 그가 신부가 되는 데 밑거름이 된다. 그 후 학업에 탁월한 모습을 보여준 그는 1981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며 1987년 의사 면허를 취득한다. 그러나 이제 꽃길만 걸을 것 같아 보였던 그는 돌연 안정된 의사 생활을 포기하고 남수단으로 선교생활을 떠난다. 대학에 다니면서 또 의사생활을 하면서 신부가 되고자 하는 갈망이 그를 선교생활로 이끈 것이다. 그때 당시 남수단은 20년째 내전 중이었지만, 그곳의 열악한 모습을 보고 선교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9년 동안 남수단에서 선교사, 의사 그리고 교육자의 삶을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데 열중했다. 예를 들어, 그는 병원을 손수 짓고, 예방 접종 사업을 벌이고, 손길이 닿지 않는 마을을 다니며 아이들을 진료했다. 뿐만 아니라 학교와 기숙사를 짓고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며 폐허가 된 학교를 보수해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꾸렸다. 그러나 2008년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온다. 그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진료한 의사의 말에 따르면 그는 말기 암 선고를 받자마자 큰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본인이 암 판정을 받아서가 아니라 앞으로 봉사활동을 계속하지 못할 것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수단에서 봉사활동을 계속한 그는 결국 2010년 4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가 의사이자 선교사였음에도 이토록 교육에 관심을 쏟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교육만이 남수단의 사람들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교육을 바로잡는 것만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전쟁 중인 나라의 아이들에게 총 대신 연필을 잡게 하였다. 과거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왜 그렇게 어려운 삶을 사냐고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그 물음에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살기를 희망했고, 지금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답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예비교사로서 이태석 신부의 정신을 받들어 교육을 위해 힘써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 희생, 헌신은 우리가 교사로서 미래에 갖추어할 덕목이며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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