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인문학에 심취하셨지만 어쩌다보니 생각지도 못한 식품영양학과를 전공해 영양사를 하셨던 엄마는 당신의 직업을 살리셨기에, 항상 밥상엔 소박해도 맛있는 반찬들이 가득했었다. 어딜 가든 "우리 엄마는 영양사예요"라고 말하면 모두가 부러워하기도 했다.

 

어릴 때 맵다며 그렇게 싫어했던 엄마의 김치찌개는 학교의 문턱을 넘어서며 내 숟가락의 단골집이 되었고, 주말마다 해주시던 비빔국수나 잔치국수가 없으면 평일이 금방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동생과 둘이서 떠났던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날, 엄마가 우릴 맞아주며 해주셨던 칼칼한 된장찌개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엄마가 현관문을 나서 별거에 들어가셨던 19살이 지난 후, 군 생활을 마치고 자취방을 얻어 혼자 살게 되기까지 엄마 밥은 거의 먹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엔가, 일 때문에 며칠을 내 자취방에서 묵으셨던 엄마는 익숙하게 찌개를 끓여내 주셨다. 그런데, 오랜만에 기대하며 먹은 찌개에서 칼칼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 맛만 가득했다. 양파가 늘어난 걸까. 국물에 설탕을 넣으실 리는 없고. 설마 싱크대에 올려놓은 이온음료를 모르고 넣고 끓이신 거야? 그 이유를 찌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리통 커져 다시 먹는 찌개가 왜 이리 달게 느껴질까. 이제 나이를 먹으니 그냥 매운 맛을 맵게 느끼지 못 하게 된 걸까.

 

아니다, 그건 분명 아니었다. 내 마음대로 생각해보건대, 그 동안 엄마는 달콤한 맛을 잊었기 때문이다. 홀로 자신만의 행성을 꾸려 복잡한 세상을 중심으로 홀로 낮게 조용히 공전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자전해야만 했던 엄마의 삶에선 달콤함이란, 그저 건너편 은하수milky way에서나 흐르는 따뜻한 우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혼으로 인해 엄마의 마음에는 그늘이 졌고, 이별로 인해 엄마가 늘 마음 속에 담아두시는 단어는 바로 나와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쓴맛과 떫은 맛이 가득한 당신만의 세상, 엄마는 ‘생존’이라는 불결하면서도 불친절한 식당에서 녹슨 숟가락과 젓가락에 의지해서 억지로 배를 채우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찌개에나마 달콤함을 대입시켜야 했던 엄마의 황야를 생각하면 마음에 칼바람이 부는 듯 시리고 으슬으슬하다. 달콤함과 새콤함을 엄마가 느끼셨던 때는 언제였을까. 내가 스물여덟 해를 엄마와 얘기하며, 당신께서 즐거워하셨던 순간이나 추억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기껏해야 나와 내 동생의 탄생. 엄마라는 존재는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이 아닌, 자식들의 엄마로 불리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 순간부터 당신 스스로가 아닌 우리에게서 행복함을 찾으셨던 것을 생각하면, 그 달콤한 된장찌개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뚝뚝한 두 아들 곁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 지금은 그 두 아들마저 곁에 없어 외로운 마음으로 회사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 고군분투를 하는 삶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것이기에, 오랜만에 하는 요리에서나마 단맛을 찾을 수밖에. 그것도 스스로 당신의 손으로 말이다.

 

떨어져가는 돈 탓에 지금 나의 앞에는 컵라면이 몇 개나 쌓여있는 지 모르겠다. 그저 끼니를 떼우기 위해 사놓은 저 컵라면들을 보니, 엄마가 해주셨던 밥이 그립다. 엄마를 만난 건 언제였는 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조만간 시간을 내서 찾아갈까? 그래도, 다시 만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별 말도 않고 엄마의 말씀을 듣기만 할 뿐 별 반응도 않겠지. 그렇지만 그것도 생명력의 증거이기 때문에 만날 수 없는 지금은 그저 웃을 뿐이다. 옛날 맛을 잊었던 엄마의 달콤한 찌개지만 여전히 그립다.

 

 

 

 

달리는 나의 빛

 

김태균

 

쏟아지듯 마알간 날에도,

부서지듯 비오는 날에도,

끈적끈적한 날에도,

으슬으슬한 날에도,

 

나의 빛은 달리고 있었다,

향방을 알지 못 한 채.

 

그 섬광은 벽에 부딪히고

건물을 뛰어넘으며

두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아주아주 빠르게 뛰었다.

 

그러다가,

잠시 숨을 돌리는 곳은

공원의 조그마한 벤치,

서점의 구석진 그늘,

혹은

음반가게의 먼지 쌓인 틈새.

 

그곳의 공기 속에서 주유하듯

마음을 가득 채우고 나서,

 

나의 빛은

다시 땅에다가 발길질을 하며

머나먼 곳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다섯 평 남짓

좁디 좁은

끈적이는 벌집과 같은

이 방의 창문 너머로

그 빛이 강한 열을 뿜어내며

기나긴 꼬리를 매단 채

유유히 공전하며 맴돌고 있다.

 

 

<봉별기>,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하염없이 쉬어볼 수 있는 주말 낮이다. 방에서 노곤노곤히 의미없는 것들을 읽다가,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상(李箱)의 자전적 단편소설인 <봉별기>라는 것까지 접하게 되었다. <봉별기>의 이야기는 대충 이러하다. 폐병 걸린 청춘의 이상은 여행을 갔다가 기생 금홍이와 사랑에 빠진다. 둘은 그저 첫눈에 보자마자 사랑했기에, 금홍이는 이상에게 화대를 요구할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이상은 금홍이의 돈벌이를 위해 이 남자 저 남자를 하룻밤 상대로 소개를 시켜 맺어주지만, 자신의 좋은 의도와는 다르게 제 기분이 몹시 분했던 듯하다. 벗어진 두 켤레의 신발 앞에서 그는 참 복잡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둘은 서울로 와서 함께 살게 된다. 하지만 이 천방지축 커플은 어디 가지 않는다. 금홍이는 며칠이고 나가서 집에 돌아오질 않고, 이상은 혼자서 괴로워하고 술자리에서 남들에게 하소연을, 그러니까 요새식으로 얘기하면 연애상담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금홍이가 돌아와 이상에게 주먹질을 해대면, 이상은 엉엉 울며 나가 며칠을 자기 집에 들어가질 못 했다. 그러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집에 돌아가면 금홍이는 버선을 벗어놓은 채 어딘가로 떠나버려 없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또 그리워진 이상이 금홍이에게 나 아프다며 편지를 보내면, 어디선가 금홍이가 달려와 바싹 마른 그를 돌보아주곤 하지만, 이내 또 떠나버린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그를 잊어내고서 친구와 술을 마시던 이상은 금홍이가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경성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접했고, 그가 지내고 있는 주소까지 받아적고 만다. 망설이고 고민하다가 결국 찾아간 이상의 눈앞에는 피로한 모습의 금홍이가 놓여있었다. 거친 파도를 머금은 둘은 별안간 또 투닥대고 만다. 너, 나 없는 사이에 새 장가 들었다며? 아니, 그럴 리가 있냐. 정말이야? 그럼. 괜히 투정부리며 베개를 던지는 금홍이와 허허 웃으며 용케 날아오는 베개를 피한 이상은 술상을 펴 한 잔 한 잔씩 마신다. 이러쿵저러쿵 떠들다가 결국 우리의 만남이 오늘로써 마지막이라는 것을 끝끝내 인정을 하며 둘은 서글픈 이별을 약속을 했고, 금홍이는 이를 기념하려는 듯 노래 한 곡조를 부른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오래된 말과 단어로 쓰여진 작품인지라 처음에 죽 읽어냈을 때엔 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홍대 인디씬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포크 듀오 가을방학이 부른 "속아도 꿈결"이라는 노래가 이 <봉별기>의 구절에서 따와 쓴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노래를 들으며 다시 읽어내니 괜시리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살구색과 하늘색이 색종이처럼 찢긴 듯이 기름처럼 뒤엉킨 듯이 풀어헤쳐진 주말의 낮 하늘은 붕붕 떠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맑아보이지도 않는 한 시트. 두 청춘의 어설프면서도 우습고, 또 한 편으로는 로맨스이기에 슬픈 이야기는 분명 모든 이들의 예전 연애담과 맞닿아 있을테다. 괜히 남에게 고등학교 시절 혹은 스무살 때나 있었던 창피한 연애담을 꺼낸 후, 신맛이 잔뜩 나는 사탕을 먹고 자꾸 웅크러드는 듯한 느낌을 느끼는 것같다. 어쩌면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내용에 흐르는 찌질함에 못 이기는 것 같기도. 그러면서도 그 때에만 가질 수 있었던 감성이라던가 할 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괜시리 입꼬리 한 쪽이 씨익 올라가며 웃어보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는 나의 마음을 한 자씩 써내렸던 장문의 문자라던가, 연락이 되지 않는 그를 만나겠다며 대여섯 시간은 되는 거리를 달려가 그곳의 시내 복판을 서성이던 나의 무모함이라던가. 모든 과정을 끝낸 후, 있었던 듯 없었던 듯했던 그 때의 모든 것은 꿈결처럼 흩어지다가도 모아지기도 했다. 금홍이가 부른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이야말로 모든 연애의 마지막 순간에 내뱉어볼 수 있는 노래의 한 파트가 아닐까 싶다. 재는 것 없이 그저 마음 하나로 만나고 다투고 헤어지고 또 다시 반복이 되었던, 꿈결 같았던 나의 <봉별기逢別記>도 어쩌면 가을방학이 부른 "속아도 꿈결"의 낭만적인 멜로디처럼 분홍색 솜사탕 같은 모양이겠지.

 

 

 

 

 

 

대학을 다니다가 스물셋에 입대하여, 군 생활 중에 공부를 해서 스물다섯에 나는 교육대학교에 진학했다. 예술학 공부를 꿈꾸던 나의 인생에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계획에 없었던 직업이지만, 이혼으로 인해 집을 나가신 어머니와 큰 빚을 져서 나의 이름마저 몰래 가져가 사채를 쓰려다가 들켜 결국 연을 끊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의 꿈을 저버리고 생존을 위해 외로이 살아가다보니 매 순간이 두려움이고 절망이었다. 함께 이야기할 친구들은 자신의 삶에도 버거워 하였기에, 나의 힘듦마저 짊어지게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모든 괴로움을 두 손으로 오롯이 받아내야만 했다. 얼마 전, 저번 학교에 다닐 때 날 많이 챙겨주셨던 교수님이 생각났다. 나에게 많은 말씀과 힘을 주셨던 분. 그 학교를 떠났지만, 그 교수님에게 나의 힘듦을 털어놓으면 그래도 홀가분해지지 않을까, 싶어 메일을 보냈다. 진작에 안부를 여쭈었어야 했는데 왠지 모를 두려움이랄까 그런 것 때문에 제대한 지 꽤 지나서야 연락을 드렸다. "이러이러해서 군대에서 생각지도 못한 수능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저러저러해서 생각지도 못한 지금의 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살아지고 있습니다." 속얘기를 가르침 구하듯 털어놓을 어른이 없다보니 교수님께 마지막 수업을 들은 후 2년 반 동안의 서사시를 써보냈다.

 

다음 날, 교수님께 답장이 왔다. 역시나 교수님은 4년 전과 다를 것 없이 글로써 말로써 나를 쓰다듬어주셨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무심하지도 않고 구구절절하지도 않은 딱 알맞은 마음과 글자수로 나에게 주신 편지의 말미에 내 마음에 콱 박히는 문장이 있었다.

 

"슬퍼하지 말고, 부정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힘차게 앞으로 나갑시다."

 

21개월의 군 생활과 공부의 병행, 제대 직후 앞으로 완전히 혼자 살아가야한다는 것에서 오는 불안함과 진로 선택의 괴로움, 입학 후 두 번째 학교 생활의 부유浮遊에서 내게 필요한 것은 저 말씀이 아니었나 싶다. 슬퍼하지 말고, 부정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것. 친구들의 위로와 격려 속에서 분명 같은 메시지가 있었겠지만 교수님이라 다르게 느껴진 것일까. 아니면 결국 힘든 시간 끝에 학교에 온 후,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온 후에 들으니 다르게 다가오는 것일까.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정말로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물론 교수님은 위로보다는 격려의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겠지만.

 

하여간 교수님의 저 말씀은 적어도 한 동안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이룬 상황에서도 "슬퍼하지 말고, 부정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힘차게 나"아가는 것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말 먼저 살아가셨던 선생님들께서는 먼저先 살아가셨기生 때문에 본질을 꿰뚫는, 진정한 것을 다시금 찾아주시게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복잡한 것들도 결국엔 하나의 무색의 단순한 핵이 있음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저작권자 © 춘천교대 신문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