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헤는 밤>, 변수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밤입니다.

견딜 수 없게 조용한 밤이에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적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밤이기도 하구요. 사실 며칠 전부터 당신을 위한 긴 글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있었어요. 긴 긴 밤의 눈물 젖은 전화나 장문의 카톡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형언하기 힘든 갈증이 있었어요. 그러나 이상하게 요새 통 펜을 들기가 쉽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가꿔왔던 나의 귀찮음병 때문인가,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게 이유는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당신한테 변명을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부러 생각하기를 그만뒀던 것 같네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 밤은 당신을 위해 펜을 들지 않으면 꼭 죄를 짓는 듯한 기분에 견딜 수가 없는, 그런 밤입니다.

며칠 전인가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햇살 좋은 날이었어요. 학교 강의동에서 정문으로 주욱 이어지는 텅텅 빈 길을 9교시 끝나고 걸어가고 있었어요. 수업이 끝나도 오늘 하루는 아직이구나, 하며 욕지거리를 뱉었던 기억이 나는걸 보니 과모임이 있었던 날인 것 같아요. 또 기억나는 게 있어요. 하늘. 3월 중순의 춘천 하늘은 애교스러웠어요. 신기할 정도로 적나라한 핑크색과 보라색의 조합에 괜히 가슴이 뛰었어요. 그리고 야트막한 건물들과 함께 핑크색 하늘을 점점이 수놓는 솜털 구름들. 얼마 전에 서울 오르새 미술관에 보았던 모네 그림 속의 하늘이 떠오르는, 그런 하늘이었어요. 지나치게 이국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핑크빛 춘천 하늘 이래서 나는 150년 전 모네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짚 더미들 속에 앉아서 150년 전의 이런 하늘을 그는 바라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문득 견딜 수 없게 붓을 들고 캔버스에다 머리 위의 하늘을 옮겨다 놓고 싶었을 거여요. 넓은 들판 위에서 그는 한없이 유약한 화가였을 것입니다. 인상주의의 시초를 이끌었던, 수많은 천재들의 모태인 모네가 아니라 그저 하늘과 바람과 햇빛의 대리인이었을 거여요. 하늘과 바람과 햇빛은 금세 캔버스 위의 그림에서 흰 종이위의 글자로 몸을 옮깁니다. 내던져진 글자들은 흰 종이를 온갖 색깔로 채우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유약함을 깨웁니다. 그러면 나는, 짚 더미들 속에 앉아서 모네가 바라보던 150년 전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직 낮이군요. 바람은 기분 좋게 불어오고 단단하게 차오르는 봄 햇살이 얼굴을 슬쩍 간질입니다. 하늘은 또 얼마나 파란지, 재수 시절 발견했던 강남시내의 하늘만큼 참으로 파랗습니다. 내심 칙칙하길 기대하며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이 너무도 티 없이 맑아서 나도 모르게 가슴 먹먹해졌더랬지요. 매섭게 깎아 지르는 건물들 사이로 고개 내민 조각하늘을 생각하며 나는 기꺼이 눈물이 흐르게 둡니다. 그 눈물이 흘러 내 발 밑의 흙을 적시고 그 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의 씨앗을 깨웁니다. 풀꽃은 별빛을 받고 자랍니다. 어느덧 어두워진 하늘 아래에 흰 소금을 흩뿌린 듯 청청히 빛나는 풀꽃이 흐붓하게 깔립니다. 나는 풀꽃과 함께 별빛을 받으며 눈물의 일생에 대해 생각합니다. 내 어머니는 눈물은 죽어서 별빛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 하늘에 지금 가장 밝게 빛나는 별빛이 가장 충만한 사랑을 뉘였던 곳이겠지요. 풀꽃, 그대가 받는 별빛은 누가 보낸 사랑의 방증인가요. 당신이 손가락을 장식해 주었던 시골소녀의 것인가요, 기꺼이 당신의 몸통을 내어주었던 허기진 들짐승의 것인가요, 아니면 허리를 꺾어 폭신한 베개가 돼 주었던 지친 나그네의 것인가요. 나에게 쏟아지는 저 별빛은 당신이 보낸 사랑의 방증임을 느낍니다.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나는 기어코 당신이 됩니다. 그는 넓은 들판 위에 가만히 앉아 하늘을 바라봅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아무 걱정도 없이 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하는데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사랑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나는 또 다시 모네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수백 점 그려내었던 일출과 일몰의 인상에서 당신의 이상을 발견하였느냐고. 형체는 희미해지고 호흡과 솜털들은 더욱 선명해지는 그 마법 같은 순간에 당신은 무얼 봤느냐고. 그 속에서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를 발견한 순간 문득 견딜 수 없게 붓을 들고 캔버스에다 머리 위의 하늘을 옮겨다 놓고 싶었을 테지요. 자, 이제 이 많은 별빛이 나린 들판 우에, 나는 한없이 유약한 화가입니다. 별빛 한 뭉치를 떼어와 나의 이상을 그려 넣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당신, 당신, 당신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그려 넣습니다. 초등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이제는 더 이상 어루만질 수 없는 얼굴들의 이름과 어느덧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복무 중인 친구들의 이름과 요새 들어 무얼 자주 깜빡한다는 내 어머니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윤동주', '톨스토이', 이런 문학가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그리고 당신은 그곳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들판 우에

당신 이름자를 써 보았습니다. 흙으로 고만 그 이름을 덮어버리며 차오르는 눈물도 함께 덮어버리었습니다. 오늘처럼 알싸한 별빛이 내 뺨을 두드리던 어느 날 밤, 당신은 나를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꽉 안아주었습니다. 나의 당신께 안기어서, 당신의 물기어린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들을 수 없는 것이, 당신의 조근한 체온을 느끼고 싶을 때 느낄 수 없는 것이 나를 얼마나 눈물 나게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눈물은 고통에서 태어나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그 아픔을 피하고 싶노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눈물은 고통에서 태어나 행복을 먹고 자란다고 했지요. 그리고 당신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아, 그제야 나는 수많은 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흘리고 간 눈물자국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하늘에는 잠을 가제 깨어 반짝거리는 별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럼 언젠가 당신을 위한 눈물이 멎는 날이 온다는 사실이 두렵다고 하는 내게 당신은 또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눈물은 행복을 먹고 자라며 침묵 속에서 영원히 잠든다고 했지요. 당신은 소리와 침묵의 양립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침묵이란 고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고귀함에 기인하여 눈물은 별빛이 되어 영원히 빛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가리키며 나의 눈 밑을 가만히 쓸어주었습니다. 그의 엄지를 스쳤던 별빛이 흘러 발밑의 흙을 적시고 별빛을 받고 자라는 풀꽃의 뿌리로 스밉니다. 나는 그와 함께 풀벌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물의 귀로(歸路)에 대해 생각합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아름다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이겠지요

 

그러나

이 봄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당신이 오면

이 밤이 지나고 나의 하늘에 그대가 나리면

어린왕자의 별에 발그레한 장미가 피어나듯이

그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별빛처럼 눈물이 가득할테지요

나는 넓은 들판 위에 가만히 앉아 하늘을 바라봅니다. 저 많은 별들은 오늘 밤에는 다 빛나지 않을 심산인가 봅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길어 모네가 눈물 흘렸던 그 하늘이 그대로 내게 내리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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