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이중자화상

 

노경민

 

나는 앉아있다

나는 내 위에 앉아있다

나는 꿈꾸고 있다

앞에서 길을 안내해주려는 교수의

말을 듣지 못 한다

 

나는 일기를 쓴다

나는 꿈꾸고 있다

나는 꿈속에서 일기를 쓴다

꿈속의 나는 내 의지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일까

 

나는 일기를 쓴다

일기에는 내 얘기가 담긴다

 

나는 눈을 뜨고 있다

꿈을 꾸며 일기를 쓴다

칠판을 향한 시선은

거울에 비춘 빛처럼 튕겨 나에게

꽂혀 나에게서 눈물로 잉태된다

피 흘리며 아파하기엔

나의 꿈은 너무 달콤하다

 

나는 꿈을 꾼다

나는 오직 내 꿈을 꾼다

나는 오직 내 일기를 쓴다

내 꿈은 네 꿈이 아니다

네 꿈이 내 꿈이 아니듯이

 

장미에 가시가 돋는다

나는 가시 돋은 줄기를 꽈악 움켜쥔다

내 손에는 향기가 뱄다

피 흘리며 가시를 품은 줄기의 향기가 뱄다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그 끝은 어찌되었건, 사랑

 

노경민

 

당신을 위해 죽는 것 보다

기꺼이 눈을 떠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리움, 이라기엔

안개가 낀 듯 뿌옇게 가려져 있고

두려움, 이라기엔

자꾸 중력을 거스르는 입 꼬리

 

그 흔한 반대말도 없는 것

 

나는, 너는, 우리는

함부로 사랑의 과거를 논하지 말아야 했다.

“사랑했었다“라는 아픈 자기 위로는

혀끝을 맴돌다 어금니에 짓밟혀 전해지지 못하니

 

사랑의 자취로부터 도망치다

문득 나는 끝을 보았고

도망쳐온 발자국에 눈물을 적시며 되돌아간다.

 

그 끝은 어찌되었건,

사랑

 

 

기대할 수 없는, 기댈 수 없는

 

노경민

 

날은 꽤나 어두웠고

춥다 말하지 않고 마냥 시원하다 말했고

 

나의 오감에는 그대가 기록되어

그 기록이 나로 하여금

눈을 감고 눈을 뜨게 하니

 

그래,

나는 함부로 오해를 하기로 했다.

 

나는 매 순간 괴롭다가 가끔씩 행복하다.

그대가, 아니 그대를 오해하는 내가,

그런 나의 오해가 나를 살게 한다.

 

그대에게 화가 나고 나에게 미안하다가

나에게 화가 나고 그대에게 미안해지는 일.

 

아,

 

그대가 함부로 아름다워

내가 함부로 오해를 시작했으니

이제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할 때

 

내가 무너지거나

그대가 무너뜨리거나.

 

 

미안하려고 태어난

 

노경민

 

오랜만에 연락이 온 친구,

부친상을 알리면서.

 

아직도 어색한 조의금

국화 한 송이와 묵념

친구야 오랜만이야.

 

울음 속에 비추는 가벼운 웃음

새삼 내 것보다 반가워서

마른안주와 맥주로 서로를 달래며

그래, 우리 어느새 어른이 되었구나.

 

조용한 마음으로 집에 가는 막차에 몸을 실었는데

문자 한 통,

“오랜만에 만나는데 장례식장이어서 미안하다”

 

네가 뭐가 미안하니,

형언 할 수 없는 먹먹함에

 

잠깐,

 

이거 미안함인가.

 

“아니야, 먼저 연락 못 한 내가 더 미안해”

 

친구야,

우린 대체 서로에게 무엇이 미안한걸까.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죽어지는

눈빛과 마음과 숨소리와 표정들에

미안한 거겠지.

 

나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태어난 게 야속해졌다.

 

 

선명 ; 피로 만든 울타리

 

노경민

 

선명하게 마주하고 싶었다

 

안개처럼 희미하게

온 몸 곳곳 퍼져있는 너의 조각들이

내 숨을 자꾸 앗아가서

 

작고 예쁜 유리병을 마련했다

그 안에 꼭꼭 눌러 담으면

예쁘게 선명해질테다

내가 편히 숨을 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생각했다

 

깨져버린 유리병을

고집스럽게 꽉 잡고

흘러내리는 피로 만들어진 검붉은 울타리에

걸려 넘어지기 전 까지는

 

몰랐다

 

선명한 기억은

가끔

날카롭다는 것을

 

 

시인의 지구는 심장에 있는가

 

노경민

 

나의 울음은 내가 적어내리는 글씨,

눈물은 심장을 갈아내어 만든 잉크,

눈물샘은 마음의 모양으로 움직이는 손가락,

나의 입은 눈물을 받아내는 노트.

 

나는 어느 새

울지 않음에, 울지 못함에 익숙해져

눈이 아닌 손으로 울고 있다

 

벌게지는 눈시울을 치켜들어

하늘과 구름을 담아낸다

 

시인의 지구는 심장에 있는가.

 

얄미운 중력이 눈물을 끌어당겨

심장에 떨어진다

 

괜찮다.

 

나는 그 심장을 갈아내어

손으로 울어내면 된다.

 

암,

그렇고말고.

 

 

얄미운 산책

 

노경민

 

사랑해서

자꾸 생각나는 걸까

자꾸 생각해서

사랑하게 된 걸까

 

나는

생각이 너무 깊어서

마음에 닿아있나 보다.

 

그래서 당신이

머리에서 잉태되어 가슴에서 태어나는지

가슴에서 잉태되어 머리에서 태어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고 보니,

억울함과 그리움은

꽤나 닮았다.

 

그리운 당신은

생각의 바닥과 마음의 천장,

그 사이 억울함에서

얄미웁게 산책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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