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빠 이야기 >

 

8월, 수은주 3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는 여름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날의 일이다.

“아민아, 아리아. 밥 먹어라.” “네~.” 방에서 책을 읽고있던 나는 어머니의 저녁 먹으라는 소리에 읽던 책을 접어두고 방문을 열고 식탁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빨리 퇴근을 하신 덕택에 오랜만에 가족 전원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이게 됐다.

내 이름은 이아민. 올해 1학년으로 입학한 새내기 대학생이다. 입학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 데 대학에서 한 학기는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처럼 순식간에 지나갔고 어느덧 대학생으로서 첫 번째 여름방학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맞는 첫 여름방학에 대한 감상을 내리자면, 기대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별 것 없었다. 용돈벌이용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종종 뜻이 맞는 친구들과 주말에 여행을 가는 것을 제외하곤 특별한 일이 없었다. 이외의 시간에는 집에서 책이나 읽으며 머릿속에 지식을 채워넣거나 스마트폰, 혹은 TV예능프로를 시청하는 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뭔가 2학기 개강하기 전에 ‘특별한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식탁에 앉았다.

우리집 식사 시간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아버지도 말수가 적고 나도 식사를 할 때는 별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한 사람’도... 주로 식사 시간에 대화를 꺼내며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은 비교적 활발한 성향의 어머니 뿐이다. 오늘도 여지없이 어머니께서 대화 주제를 꺼내셨다.

“아민아, 내일모레부터 아빠랑 둘이 충청도 숙부네에 제사를 갔다올 거야.”

“음, 며칠 정도 갔다오실 생각이세요?” “아빠는 출근도 하셔야하니까, 하루 묵고 바로 돌아올 생각이란다.” 머릿속으로 날짜를 곱씹어봤다. 오늘이 목요일이니 내일모레는 토요일, 어머니의 말씀은 아버지와 함께 주말동안 집을 비우신다는 소리였다.

“흠, 뭐 알겠어요. 잘 다녀오세요.”

“돈은 주고 갈테니 밥은 끼니마다 챙겨먹거라. 배달 음식으로 대충 때우지 말고.” 큭, 어머니께 짜장면이나 치킨으로 대강 끼니를 때우려는 생각이던 나의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다. 말없이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내 옆자리에는 나와 부모님을 제외한 또 다른 ‘한 사람’이 앉아있다. 그 사람은... 바로 내 여동생, 이아리 양이 되시겠다. 옅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큰 눈과 오똑한 코를 가진 내 여동생은 누가봐도 미인이라 단언할 수 있는 용모를 가지고 왔었다. 일과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틈새도 없이 바로 식탁에 앉기라도 한 것인지 동생은 교복 차림새였다.

“그렇게 됐으니, 아리야. 오빠랑 이틀동안 집 보는거 잘해줘. 알았지?”

“네, 알았어요.” 딱딱한 목소리의 단답, 이쁘장한 용모와 다르게 내 여동생은 살짝 중성의 느낌이 드는 굵은 목소리를 가졌다. 그래서인지 더 딱딱하게 들린다.

“돌아올 때 뭐라도 선물 사가지고 올테니까... 오빠랑 잘 지내야해.” “그만해, 정말~. 이제 애도 아닌데, 괜찮다고.” 살짝 미소지으며 동생은 대답한다. 그 찰나의 순간에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보기 좋았다. 평소에도 이렇게 웃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그래, 이제 다 컸으니까 별 걱정 하지 않을께.”

어머니도 입에 미소를 머금고 대답한다. 이로서 부모님도 안심하고 집에서 출발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나는,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여동생과 이틀 간 단 둘이 집에 있을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식사를 하는 내내 나와 동생은 시선을 한 번도 마주치는 일 없이, 한 마디의 말도 주고 받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사이가 나빠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그 이전의 문제로, 나와 동생은 훨씬 이전부터, 일체의 교류가 없었다. 싸워봐야 소용없다는 것은 아마 우리의 이런 비정상적인 남매 관계를 말할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겠다.

나와 여동생은, 의식의 흐름 속에서 인식하는 기억의 저편에서부터 쭉 오랜 기간동안 심각한 냉전 상태에 있었다.

 

어느덧 토요일 아침이 되었다. 나와 아리는 집을 나서는 부모님을 배웅하기위해 아파트 로비 앞까지 나왔다. 사실은 동생과 함께 행동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보시는 동안에는 겉으로나마 괜찮은 모습을 보여놔야 집을 비우신 부모님께서 걱정을 안하실 것이란 생각에 일부로 로비 앞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럼, 다녀오마.” 승용차에 탑승한 아버지는 차창 문을 내리곤 말씀하셨다.

“선물 사가지고 올게.”

아버지보다 안쪽에서 어머니의 인사말이 들린다.

“잘 다녀오세요.”

“잘 다녀와, 엄마, 아빠.” 나와 동생은 각각 작별 인사를 한다. 그 후 승용차는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동생은...

“휙.” 바람 소리가 들릴만큼 빠르게 뒤돌아선 다음 성큼성큼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응?”

로비 안으로 들어간 동생은,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 1층에 서 있던 엘리베이터에 탄 다음 문을 닫고 우리집이 있는 1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뭘 어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쳇, 같이 엘리베이터 타는 것도 싫다는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1층까지 엘리베이터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까지 올라가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 동생은 엘리베이터라는 작은 공간에 나와 단 몇 초도 있게된다는 사실조차 싫다는 건가... 도대체 우리 사이가 왜 이렇게 되버린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점이 머릿속에서는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분명 어렸을 때 어느 순간에는 여타 다른 남매들처럼 사이 좋았던 순간이 분명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니 동생은 거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내가 집에 들어왔다는 사실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채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카톡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나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카톡을 하고 있는 동생에게 말을 건다.

“야.”

확실히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게 분명한데도 동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애초에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대놓고 무시를 당하니 혈압이 오르는 건 당연지사였다.

“대답 정도는 하라고. 들렸잖아.” 그러니 동생은 슬쩍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본 후 다시 카톡에 열중했다.

“...칫... 짜증나.”

“뭐어?” 그리고 또 말이 없다. 부모님을 대할 때와는 분명히 다른 태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참았다. 어차피 화내봐야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나친 감정 소모를 한 내가 지치게 될 뿐이다.

이래서 이 녀석과 단 둘이서 집보는 게 싫었다. 지금처럼 쓸데없는 불편한 대치를 해야하는 상황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뭐, 불평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감정 소모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빨리 용무나 마치기로 마음 먹었다.

“너 오늘 밥은 어떻게 할 거야?”

“...” 역시 대답이 없다. “대답 하라고. 귀 먹었니?” 적의를 한 가득 담은 말투로 말하자, 그제서야 겨우 불쾌하다는 듯이 한껏 얼굴을 찡그리고선 대답을 했다.

“시끄럽네... 먹을거야. 집에서.”

카톡 자판을 두들기며 대충 단어만 내뱉는 형태로 대답한다. 그래도 이 정도의 대답이 돌아온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쩝, 알겠다. 그럼.” 용무를 마친 나는 이 불편한 대치를 빨리 끝내고픈 마음에 내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거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 집에 있는 건 나와 동생 뿐, 그렇다면 동생은 분명 날 부른 것이다. 방문 손잡이 손을 놓은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동생은 여전히 카톡에 집중하고 있을 뿐, 나를 보진 않았다.

“왜?”

그래도 난 부르면 대답은 한다. 그게 나를 부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돈 줘.” “뭐?”

순간 동생이 내 돈을 달라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이성이 돌아왔다. 방금전, 어머니께선 출발하기 전에 내게 만원권 지폐 다섯장을 쥐어주셨다. 아마 동생이 한 말은 어머니께서 이틀간 식비로 쓰라고 주신 돈을 달라는 의미일 터였다. 둘이 식비로 쓰라고 준 돈이니 자신에게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동생과 충돌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군말없이 만원 지폐 세 장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식탁 위에 둔다.” 내 말이 끝나기무섭게 동생은 소파에서 일어서 식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갑자기 움직여서 순간 놀랬다. 식탁 위에 놓인 금액을 확인한 후 동생은 식탁 옆에 엉거주춤 서 있는 날 보고 말했다.

“...방해야. 비켜.” 동생은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가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내 마셨다.

“짜증나네.” 버릇없는 동생의 태도에 나도 한 마디를 툭 내뱉고는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쾅 닫았다.

이로서 주말 이틀 간 부모님 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 있어 동생과 필요한 ‘최소한’의 대화는 다한 셈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지금의 이 험악하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대화조차 일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일이다. 평소에는 이보다 더 서로를 무시하고 아예 서로를 없는 셈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하지만, 나는 동생이 정말 싫다. 빨리 독립해서 저 녀석과 떨어져서 살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부모님께서 자취를 허락하진 않으시니 나의 고정수입이 생길 때까진 별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오후 시간을 친구들과 밖에서 보냈다. 굳이 동생과 함께 있는 불편한 공기를 느끼며 집 안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전전하다보니 어느덧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친구들과 헤어져 나는 동네 마트에서 장을 봐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까지 해결할 식재료를 구입했다.

그리고 저녁 7시, 나는 동생과 같이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어머니가 해놓고 가신 된장국과 김치, 그리고 내가 3분 카레로 오늘 사온 야채와 고기로 썰어넣고 만든 카레라이스가 놓여졌다.

“잘 먹겠습니다.” 동생과 한 식탁에 앉아있다는 어색한 분위기를 타개하기위해, 굳이 하지도 되는 말을 했다.

“... 잘 먹겠습니다.” 그러더니 동생과 내 말을 따라했다. 흠, 따라하리라곤 생각못했는데 이 녀석도 나와 같이 저녁을 먹는 이 시간이 소름끼치도록 어색했던 모양이다.

숟가락을 들고 우린 카레라이스를 먹기 시작했다. 이따끔씩 된장국을 들이키는 소리가 후루룩 하고 들렸다.

새삼 습관이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집은 비교적 통금이 엄격한 편이라 저녁식사 시간은 저녁 7시로 정해져있다. 그 시간을 지나면 저녁식사는 없다는 게 우리집의 규칙이었고 이는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준수되어왔다. 즉, 부모님이 부재 중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남매는 통금을 지켜 언제나처럼 식탁에 앉아 서로 싫어하는 상대와 마주보고 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아리는 이 집에 나와 단 둘 뿐인데도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한 상태였다. 달리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을 했다는 사실이 우리 둘 사이에 있는 거리를 상징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 뭘 보는거야?” 동생이 내가 자기를 보고있는 걸 눈치채고는 꽤나 불쾌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아니... 그냥... 가족 앞인데도 넌 화장을 하는 구나.”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응?” 나의 대답을 들은 동생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혐오에 가득찬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내 마음인데? 불만이라도 있어?”

가시돋친 목소리로 반문한다.

“아니. 그럴 리가.”

나는 즉각 반박했다. 이 녀석과 말싸움은 쓸데없는 감정 소모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나는 다시 카레라이스를 숟가락으로 퍼먹는데 집중했다. 카레라이스가 푸석푸석 씹혔다.

그리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동생도 별 말 않고 카레라이스를 먹는데 집중했다.

“카레라이스 적당히 사왔는데, 이걸로 아침까지 먹을 수 있을까?” 동생이 대답할 리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입은 또다시 열렸다. 어머니의 주도로 대화가 오고가는 식사 자리에 익숙한 뇌가 이 어색한 침묵을 버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동생은 대답하지 않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철저한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뒤로 담담히 식사를 계속하는 우리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어쩌면 흐뭇한 광경일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사이 좋은 남매가, 사소한 걸로 싸워서, 서로 토라져서 고집을 부리며 상대방을 무시하고 있는 그런 상황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둘다 상대방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주길 내심 바라고 있는, 그런 귀엽고 풋풋한 남매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 엄연히 다른 법이다. 우리들은 진심으로 상대방을 싫어하고 있다. 나도 그렇고... 이제껏 나에 대해 가진 태도와 행동을 돌이켜본다면 아마 동생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잘먹었습니다.” 식사를 끝낸 아리가 자신이 먹은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기를 싱크대로 가져간 아리는 말없이 설거지를 시작했다. 물 흘러내리는 소리와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씻는 소리 따위가 침묵을 깨고 귓가를 자극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들려오는 식기 씻는 소리가 이렇게 들려왔다.

“아아, 기분 나빠. 기분 나빠.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빠.”

마치 동생이 내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비수가 날아와 심장에 꽂히는 기분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동생은 미련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쾅.” 동생방의 방문이 요란스럽게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진짜, 언제부터 우리들이 이렇게 되어버린거지?” 분명 이렇게 험악하고 서로 무시하는 관계가 되어야겠다고 의도한 것은 아닐 터였다. 아주 오래 전, 우리 모두 어린 꼬마였을 때는 사이가 좋았던 시절이 분명 있었을 터였다.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나와 동생이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을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동생을 업어주기도 하고, 동생이내 손을 잡고 이끄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 등... 사진 속 우리들은 세상 그 어느 남매보다 친해보였고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웬수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건지 모르겠다. 관계가 이렇게 악화된 이유를 모르겠고, 그와 관련한 기억도 머릿속에 없었다. 마치 관계가 악화되기까지의 그 과정을 누군가 그 부분만 머릿속에서 삭제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사소한 이유로 우리가 싸움을 했고, 화해할 기회조차 놓쳐버려 그대로 몇 년이 지나 싸움의 이유조차 망각해 지금과 같은 관계가 됐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하지만 설사 그 추측이 맞다고한들, 이제와서 다시 이전처럼 사이 좋은 남매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무리인 이야기이다. 이미 관계는 악화될대로 악화되었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나와 동생 모두 인식하고 있는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의 관계가 혹시라도 변화하는 전환점이 마련되려면, 그 전환점이야말로 그간 우리가 서로를 무시해왔던 오랜 시간과 필적한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계기로 비롯될 것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내 몫의 식기를 설거지하고 반찬을 냉장고에 집어넣은 후 욕탕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일주일 간 묵은 때를 벗기니 한결 몸이 상쾌하고 개운해졌음을 느꼈다.

“후아... 시원하다.” 목욕 마친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꺼낸 쥬스를 시원스럽게 들이키며 읽고있던 책을 집어들었다. 책이나 조금 읽다가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잠자리에 들기엔 평소보다 다소 이른 시간대지만 불편한 동생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빨리 잊기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렇게 말 많고 탈 많았던 하루가 마무리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창 밖에서 번쩍하고 빛이 났다.

“응? 뭐야?” - 우르르 쾅쾅

빛이 난 창문을 볼려고 하는 순간 엄청난 뇌성이 울려퍼졌다. 이어서 전기가 파직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집 안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삽시간에 집 안은 어둠으로 휩싸였다. 아무래도 방금 친 벼락으로 차단기가 내려가 정전이 된 것으로 보였다.

- 쾅쾅

이어서 또 번개가 내리꽂히면서 천둥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어서 쏴아아 하는 물소리와 함께 강한 폭우가 창문을 뚫을 기새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조명등을 켰다. 빛을 확보하게되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차단기를 올리기위해 방에서 나와 현관 옆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현관 옆의 벽을 스마트폰 조명등으로 비추고 차단기를 힘껏 올렸다.

하지만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단기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현관의 조명등이나 거실의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가 내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순간 휘이잉 하는 바람소리가 창문과 거세게 부딪혔다. 스산한 바람 소리는 암흑에 껄린 집 안과 함께 어우러져 내면에 있던 깊은 공포심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했다. 오래 전에 봤던 공포영화와 유튜브에서 본 공포영상이 차례차례 머릿속에서 연상되기 시작했다.

“으윽, 안돼.” 세차게 고개를 흔든 나는 우선 다른 가정도 우리집처럼 정전이 발생했는지 확인하기위해 창문을 열어제쳤다. 하지만 나는 다른 집의 상태를 살필 틈새도 없이 다시 창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창문을 연 순간 거센 폭우가 거실 내부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잠깐동안 창문을 연 사이 들이닥친 빗줄기로 깔끔했던 거실 바닥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왜 부모님이 없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창문을 여는 바람에 흠뻑 젖어버린 옷을 갈아입기위해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옷을 갈아입느라 시야가 차단된 순간에도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불현 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폭우가 요란스럽게 내리고 번개가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르는 밤, 정전이 되버린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은 제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두려울 것이다.

그러고보니 집에 혼자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 불현 듯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동생은 방에 있는 건가? 온 집안이 정전이 되어버렸으니 방에 있었다면 반응이 있었을 텐데 집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혹시 정전이 되기전에 잠들었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동생방으로 걸어갔다. 동생방은 불이 꺼진 채로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살짝 더 열어 방 안을 스마트폰 조명등으로 비춰보았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흐음... 그새 나간건가?” 저녁을 먹은 후 내가 목욕을 마치고 욕실을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동생은 집에 있었다. 친구랑 통화를 하는지 동생의 목소리가 동생방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방에 들어간 후 정전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분여 밖에 되지 않았다. 그 사이 동생이 집을 나갔을 리는 없다. 그랬다면 분명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밖에서 별다른 인기척은 없었던 걸로 기억했고 이는 동생이 집 안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였다.

“아리아... 어딨니...”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나는 동생을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동생을 이름으로 직접 부르는 것은 실로 몇 년만의 일이었다. 다시 집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내 방과 동생방, 거실과 부엌에는 일단 사람이 없는 걸로 확인됐고... 남은 건 욕실 하나 뿐이었다.

“철컥.” 역시 욕실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동생은 욕실에 있다가 정전을 맞은게 분명했다.

“똑똑.”

한숨을 푹 쉬곤 욕실문을 두들기는 순간--

“꺅... 누, 누구야?” 욕실 안에서 비명이 들여왔다.

“으아앗!” 가뜩이나 공포에 가득 질린 상태였던 나도 기겁을 하며 욕실 문으로부터 뒷걸음쳤다.

“누, 누누누구야? 거기 있는 사람 누구야! 드... 들어오지마 변태! 들어오면 죽일꺼야!” 엄청 혼란에 빠진 듯한, 평소에는 전혀 들을 수 없었던 당황하고 공포스런 감정에 가득 찬 아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욕실문을 울렸다. 아리의 엄청 필사적이고 절실한 으름장에 나는 허둥대면서도 목소리를 냈다.

“아... 아리니?” “에엣? 아...” 욕실문 저편에서 아리는 목소리의 톤을 푸욱 내렸다.

“...뭐야, 너였어? 하아...” 진짜로 혼이 빠져나간 듯한 목소리였다.

“저, 정말! 놀라게 하지마!” “미, 미안해.”

갑작스러운 비상사태에 나도 동생도 서로가 놀란 나머지 여유가 없어져버린 것 같았다. 상대방을 몇 년이나 계속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한순간 망각한 채, 어느새 평범하게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다.

“모, 목욕하고 있는데... 가, 갑자기 새까매져서...” “그... 그러냐.”

조금 진정이 되는지 동생은 다소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욕 중에 정전이 되었다... 아마 여린 마음의 고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공포스런 상황임이 분명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울먹이는 소리로 동생은 답하기 어려운 걸 물어왔다.

“전기... 안 들어오는 거야?” “...” “... 진짜 거기 있는거 맞아? 있는거 맞지?” 울먹이면서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두렵다는 소리였다. 왠지 내면 속에 잠자고 있던 보호 본능을 일깨우는 것처럼 들렸다.

이럴 땐, 오빠로서 여동생을 진정시켜주는게 도리겠지?

“차단기를 올려봤지만, 전기는 들어오지 않더라.” “... 그럼 언제 들어오는데?”

“나도 모르겠어. 관리사무소에 전화해볼까?” “웅... 부탁할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탁하는 동생의 목소리를 들으니 몇 년만에 처음으로 동생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쳇, 평소에는 그렇게 도도한 척을 하면서 무시하더니 막상 급하니까 그래도 믿을만한건 오빠밖에 없지?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손에 들고있던 스마트폰으로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관리사무소는 갑작스런 뇌우로 손상된 장비를 복구하는 중이므로 30분 이내에 전기가 다시 들어올 거라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관리사무소와 연락했어. 지금은 수리 중이고 30분 후면 전기가 다시 들어온대.”

“아... 하아.... 다행이다.” 안도한 동생의 목소리가 욕실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안심한 목소리를 들으니 문득 장난기가 솟아올랐다. 갑작스런 비상사태에 나도 어딘가 고양된 탓인지, 평소에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질문을 동생에게 건넸다.

“솔직히 말해봐. 너 무섭지?”

“뭐...?” 순간 동생이 당황했다는 것이 문 밖까지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당황함을 숨기기 위함인지 동생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것과 어느새 똑같아져 있었다.

“풉!” 욕탕 안에서 당황한 동생의 모습이 상상되어 웃음이 터져나왔다.

“에? 왜... 왜 웃는거야! 나가면 진짜 죽일꺼야!” “아... 아냐. 큭큭. 미안해.” “저... 정말! 너무해!” 평소의 우리라면 절대 나누지 않았을 대화, 그랬던 우리가 다른 평범한 남매들처럼 장난을 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음, 지금 생각난 거지만, 이전에 우리가 어렸을 때도 벼락으로 정전이 되었던 적이 있었지 아마? 그 때도 너 막 당황해서 엄청 울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너 달래주느라 엄청 고생하고... 뭐 그냥 그랬던 기억이 생각난다고.”

“...” 대답이 없다. 갑자기 옛날 기억을 끄집어내서 화라도 난걸까?

하지만 동생의 대답 유무와 관계없이... 어째선지, 그리웠다. 그 때 그 시절, 여느 남매와 다름없이 친하게 지냈던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기억의 파편 속에 흩어져 있던 추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이 발하는 빛만 존재하는 어둠에 다시 침묵이 깔렸다. 바람이 요란스럽게 창을 흔드는 소리와 빗방울이 창문에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나도 동생도 언제나처럼 조용히 있는 채로, 언젠가처럼 함게 있었다.

둘이서 집보기에, 천둥이 울리고, 정전이 되어서... 그 때는 아직 어리고 울보였던 동생을 달래주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났다. 마치 첫사랑을 추억하는 것처럼 아련한 기억이다. 마음 한구석이 사무치게 아려왔다.

“저기... 아직 거기에 있어?” “응, 어어.” 아차, 내가 계속 욕실문 앞에 진을 치고 있으면, 이 녀석이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아리야, 스마트폰 조명등 일단 켜둔채로 여기 놔둘게. 난 들어갈테니까...” “아니...! 방으로 돌아가지 말고...” “응?”

“여기 있어줘. 오빠... 나 너무 무서워...”

오빠. 오빠,오빠,오빠... 오빠라는 단어가 귓가에서 메아리친다. 방금 내 여동생, 아리이는... 근 몇 년만에 처음으로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내가 동생을 몇 년만에 이름으로 부른 것처럼...

아마 전기가 나가면서 우리 둘 다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고 ‘야’, ‘너’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로를 불렀다.

아리의 오빠라는 말에 다리에 힘이 빠져버렸다. 털썩 욕실문 앞에 앉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불이 다시 들어올 때까지 여기 있을께.”

“응... 고마워.” 왠지 낯간지러웠다. 몇 시간, 아니 한 시간 전만 해도 머릿속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뇌에 심한 인지부조화를 가져왔다. 설마 지금 이게 꿈은 아닐까 싶은 허튼 생각마저 들었다.

“저기... 오빠.” “응?”

욕실 안에서 동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거 기억나? 나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오빠가 나한테 초등학교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줬던거... 유치원 졸업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복도에서는 뛰지 말라 그러고, 점심은 교실이 아닌 식당에서 먹으라고 하고, 중앙계단은 사용하지 말라고... 그랬던 거...” 아... 아리의 설명을 들으니 의식의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그 때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내 나름대로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동생이 걱정되서 이것저것 알려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동생에게는 꽤 강한 잔상으로 기억된 모양이다.

“풉,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지.” 과연 우리가 함께 어렸을 적 추억에 대해 이야기 나눴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기억 상으로는 없다. 이렇게 서로 간의 공통된 기억을 동생과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동생이 던진 추억이 내 마음 속에 있던 어떤 빗장문을 열어제친 느낌을 받았다.

“우리... 왜 이렇게 된걸까... 분명 어렸을 때는... 친하게 지냈던걸로... 기억하는데...” 평소였다면,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을 내뱉고 말았다. 우리의 결코 정상이라 볼 수 없는 남매 관계,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점을 나는 동생에게 물은 것이다.

“...” 욕실 저편은 침묵을 유지했다. 아마, 동생도 이 질문을 듣고 나 못지않게 당황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질문을 한 나조차도, 내가 죽기 전에 이 질문을 동생에게 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건... 그건...”

말을 더듬으며 뭔가 주춤하는 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은...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그게 대체 뭘까?

주의 깊게 동생의 다음 단어 선택에 집중하고 있던 그 순간...

“파팟!” 전기가 켜지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갑자기 환해졌다.

“으앗.”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에 갑작스런 불빛은 쥐약이었다. 황급히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이미 잔상은 망막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30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장비 수리가 빨리 끝났는지 전기가 예고없이 들어왔다.

불이 켜지고 주위가 똑바로 보이니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동생이랑... 무슨 대화를 나눈거지? 갑자기 미친 듯이 부끄럽기 시작했다. 마치 첫사랑에게 고백할 때처럼 얼굴이 벌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에... 그러니까...”

내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사이 문 건너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야,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목욕탕 나갈테니까 빨리 방에 들어가버려!”

“...”

어느새 아리도 본래의 여동생 모습으로 돌아와있었다. 얘도 전기가 들어오니까 정신이 같이 돌아온 것 같았다.

“...야! 아직도 있는거야?” “네에네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칫! 혀를 크게 차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일부로 큰소리가 나게 방문을 닫고는 침대에 들어누웠다. 그럼 그렇지, 내가 여동생하고 친해질 리가 없지라고 곱씹으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치 전기가 나갔을 때 여동생과 있었던 일이 한낱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그 때였다.

“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동생이 분명했다.

“왜?”

평소처럼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방문이 삐그덕 하고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화가 난 것도, 그렇다고 웃는 것도 아닌 무표정 상태인 여동생이 삐쭉 얼굴을 내밀었다.

“뭐! 또 할 말 있어?”

“닥쳐! 그냥 들어.”

정전 때 욕실에 있을 때와는 180도로 달라진 목소리와 분위기였다. 동생이 무슨 말을 할까 노심초사하며 잔뜩 긴장한채로 동생의 다음 말을 주시했다. 동생은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절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고마웠어.”

“뭐?”

“쾅!”

뭐라 물어볼 새도 없이 방 안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었던 동생은 방문을 닫고는 나가버렸다.

그렇게 나는 닫힌 방문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틀 후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부모님은 숙부댁에서 하루 머물고 어제밤에 무사히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아침부터 회사에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다며 새벽같이 나가셨고 동생은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나도 어제밤에 갑자기 잡힌 아르바이트 대타를 뛰기 위해 참으로 오래간만에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아침 먹거라.” 씻고 옷까지 막 갈아입었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네.”

대답을 하고 방에서 나가 식탁에 앉았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된장국에 고등어구이였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빠른 식사량으로 밥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된장국을 마시는 나를 보며 옆에 앉아 교복을 입은 채로 같이 아침을 먹던 여동생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뜸 내게 말을 걸었다.

“야, 누가 쫒아오냐? 천천히 좀 먹어.” 순간 동생이 먼저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애써 태연하게 받아쳤다.

“시끄러. 아르바이트 늦었다고.”

“으이그. 그러게 빨리 좀 일어나지, 게을러 터져갔고.”

“뭐래는 거야. 이 고삐리가.” 말의 대부분이 장난으로 점철된 대화였지만 자연스럽게 동생과 대화가 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저께와 욕탕문을 마주하고 나눴던 살가운 느낌의 대화는 분명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우리 남매가 대화를 나누고있다는 거 자체에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호오, 둘이 좀 친해졌나보네?” 어머니께서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질문하셨다.

“에에? 그런 거 아니거든!” 동생이 어머니의 질문에 먼저 반발하고 나섰다.

“친하긴 무슨...” 이에 질세라 나도 반박의 말을 했다.

어머니는 우리 둘의 모습이 재밌는 모양인지 깔깔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호호, 너희 엄마아빠 없는 주말을 같이 보내면서 제법 친해진 모양이네? 너희가 너무 안 친해서 솔직히 걱정 많이 했는데, 앞으로는 아빠랑 같이 자주 집 비워야겠다. 너희 더 친해지라고.” “무슨 소리야!” 나와 동생이 동시에 소리쳤다.

“오빠 따윈 정말 싫거든!” “동생 따윈 정말 싫거든!”

공교롭게도 서로의 말이 정확히 겹쳤다.

“봐봐, 벌써 통하는게 있네.” 어머니는 웃으면서 우리를 놀려댔다. 어머니께서 놀릴때마다 지난 밤에 있었던 동생과의 낯간지러운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도저히 아침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런, 엄마. 나 아르바이트 늦었다! 먼저 갈께!”

후다닥 식탁에서 일어나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현관문으로 달려가는 사이, 뒤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앗! 엄마, 나도 학교 늦겠다. 갔다올께!” 동생도 학교가 늦었는지, 아니면 자리를 피하려는 건지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과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우를 저지르지 않기위해 나는 재빨리 신발을 갈아신고 현관문을 열어제쳤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몇 초를 기다렸을까, 엘리베이터는 우리층에 멈춰섰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이었다.

“기다려!” 현관문이 열리며 동생이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헐레벌떡 뛰어와 엘리베이터에 뒤따라 탔다. 부엌에서부터 뛰어온게 힘든지 동생은 숨을 헐떡이면서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너, 뭔데 나 따라다니냐.” 내 옆에 서 있는 동생에게 물었다.

“뭐래. 난 학교 가는거거든.” “학교를 왜 벌써 가?” “고등학교는 벌서 개학했어요~. 이 바보야!” 1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동생은 대뜸 나한테 메롱하곤 쏜살같이 엘리베이터를 뛰쳐나갔다. 이에 질세라 나도 엘리베이터 밖을 뛰쳐나갔다.

로비 밖으로 나온 우리 남매는 서로 질세라 아파트 정문을 향해 질주했다.

“너 뭔데 계속 나 따라오냐. 재수없어!” “웃기고있네. 나도 아르바이트 가는 거거든? 따라오는 건 너야 너.” 이렇게 상대의 심기를 긁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서로에게 가시돋힌 말을 내뱉기는 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아는 척도 안하던 불과 며칠 전과 비교하면... 조금은 동생과 친해진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착각하면 안된다. 여전히 나는 동생을 끔찍이 싫어한다.

하지만... 하지만, 동생을 조금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생겨났다. 동생과 함께 정문으로 전력질주를 하며 생각했다. 만약, 지난 주말에 부모님께서 집을 비우지 않아셨더라면, 비우셨더라도 내가 다른 친구 집에서 잤다면, 우리집에서 잤다해도 폭우가 오지 않았다면, 폭우가 왔다해도 정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동생과 가시돋힌 말이라도 주고받는 사이가 될 수는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난 주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동생과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힐 수 있도록, 하늘이 도운- ‘여름밤의 기적’이 아닐까 하고

 

 

 

 

 

 

 

 

 

 

 

< 여동생 이야기 >

 

8월의 무더운 여름날, 어느새 여름방학도 그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사실 대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의 입장에서 방학은 어렸을 때와 달리 설렘을 주는 단어는 결코 아니었다. 고등학생에게 있어 여름방학은 무더운 여름날에도 학교에 나가 보충수업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다른 의미는 없다. 오늘도 나는 오후까지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받고 왔다.

내 이름은 이아리. 근처 여고에 다니는 고등학생이다. 성적은 보통, 뭐 자랑은 아니지만 주위에서 미인이라는 평을 많이 듣는다. 그런 평을 들으면 살짝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이쁘게 봐준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아민아, 아리아. 밥 먹어라.” 학교에 입고 간 교복 차림새 그대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친구와 카톡을 하고 있던 내 귓가로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나는 방문을 열고 식탁에 가서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우리집 식사 시간은 조용한 편이다. 나도 친구들이랑 밥을 먹을 때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집에서 먹을 때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가족끼리 밥먹다 이야기하다보면 ‘그 녀석’하고 말을 섞게 될지도 모르니깐. 으으, 정말이지 불쾌한 일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온몸에 오한이 돋았다.

이런 연유로 우리집 식사시간의 대화는 엄마가 어떤 질문을 하면 각자가 대답하는 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그 날의 저녁식사 어느 때처럼 엄마가 입을 여는 것으로 대화의 포문이 시작되었다.

“아민아, 내일모레부터 아빠랑 둘이 충청도 숙부네에 제사를 갔다올 거야.”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음, 며칠 정도 갔다오실 생각이세요?” “아빠는 출근도 하셔야하니까 하루 묵고 바로 돌아올 생각이란다.” 즉, 엄마의 말은 숙부네 제사 때문에 주말동안 집을 비운다는 뜻이었다.

“돈은 주고 갈테니 밥은 끼니마다 챙겨먹거라. 배달 음식으로 대충 때우지 말고.” 음? 용돈은 주시고 갈 생각인가? 아싸 그걸로 밖에서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먹어야지. 이틀 동안 집을 비우시는 거면 그래도 제법 넉넉하게 용돈을 주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됐으니, 아리야. 오빠랑 이틀동안 집 보는거 잘해줘. 알았지?”

응? 아... 맞다. 젠장,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진다. 부모님이 이틀 간 집을 비우신다는 소리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고, 함께 하고싶지도 않은 칙칙하고 기분나쁜 녀석하고 같이 집을 봐야한다는 소리잖아?

“네, 알았어요.” 그래도 대답은 해야하니, 최대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싫다, 진짜 싫다. 저런 끔찍한 녀석하고 같이 집을 봐야한다니-. 온 몸에 오한이 돋는다. 주말에 하루종일 친구랑 놀다가 저녁 늦게 집에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저 녀석하고 있는 시간은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돌아올 때 뭐라고 선물 사가지고 올테니까... 오빠랑 잘 지내야해.” “그만해. 정말~. 이제 애도 아닌데, 괜찮다고.”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엄마는 뭐 저런 끔찍한 녀석한테 태연스럽게 ‘오빠’라고 칭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래그래, 이제 다 컸으니까 별 걱정 하지 않을께.” 엄마는 걱정이 없다는 투로 이야기 했지만, 당사자인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는 바로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 때문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이름은 이아민, 우리 부모님 밑에서 나보다 3년 먼저 태어났다. 사회 보편적인 단어로 칭한다면 나의 ‘친오빠’ 되시겠다. 하지만 나는 이 끔찍한 사람을 친오빠라고 칭하고 싶지도 않다. 아니, 그냥 아예 그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거 자체가 싫었다. 같은 지붕 아래에 가족이랍시고 같이 사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거기다 단 둘이 집까지 같이 봐야한다? 그건 아마 근 몇 년동안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경험이 될 터였다.

나와 그 녀석은 지난 몇 년,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 간에 일체의 교류가 없었다. 우린 서로를 무시했고 서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이렇게 안좋아졌는지 여부에 대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지만,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본능이 나로 하여금 그 녀석을 철저히 무시하고 혐오하도록 만들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토요일 아침이 되었다. 나는 부모님을 아파트 1층 로비에까지 내려와 배웅하고 있었다.

“자 여기, 오늘의 식비야. 밥이랑 국은 해뒀으니 적당히 반찬사서 집에서 먹으렴.”

“네, 알겠어요. 잘 다녀오세요.”

엄마는 그 녀석한테 용돈을 주며 말했다. 그 녀석은 내게 들리기엔 꽤나 가식적인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각자에게 용돈을 주는 걸로 생각했던 나는 엄마가 그 녀석한테만 용돈을 주자 빈정이 팍 상했다. 엄마는 나보다 저 기분나쁜 녀석을 더 신뢰하는 건가?

“에? 따로 주는거 아니었어?” 내가 날이 선 목소리로 엄마한테 물었다.

“같이 쓰면 되잖니.” 엄마는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니, 엄마. 그거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고. 엄마의 말은 즉, 저 끔찍한 녀석하고 말을 섞어야만 내 몫의 용돈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다녀오마.”

승용차 운전석에 먼저 올라탄 아빠는 차창 문을 내리곤 말씀하셨다. 뒤이어 엄마도 조수석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선물 사가지고 올게.”

“잘 다녀오세요.”

기분이 끔찍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꾹 참았다. 이틀 간 못볼텐데 부모님께 싫은 티를 낼 수는 없다. 겉으로나마 밝은 티를 내며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잘 다녀와, 엄마, 아빠.”

인사를 주고받은 후 승용차는 빠르게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로비 안으로 돌아갔다. 거의 뛰듯이, 마치 지각했을 때 등굣길처럼 아주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서있었다. 재빨리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제발 빨리 닫혀라 닫혀라 하는 심정으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그 녀석이 올라타기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휴우... 십년감수했네.”

하마터면 그 녀석이랑 단 둘이 엘리베이터를 탈 뻔 했다. 같이 집을 봐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짜증나 죽겠는데, 같이 엘리베이터까지 타야한다면... 오우, 상상하기도 싫다.

다시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부모님이 없어진 집 안에는 울적한 공기가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 그 이유모를 쓸쓸함을 떨치기위해 친구와 약속시간이나 잡자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꺼내들고 카톡에 접속했다. 친구에게 선톡을 보낸 순간, 철커덩하고 현관문이 열린다.

아마, 1층에 혼자 덩그라니 남겨졌을 그 녀석이 들어온 모양이다. 쳇, 알까보냐. 신경쓰지않고 친구와 카톡에 집중했다.

“야.”

현관으로 들어온 그 녀석이 나한테 물었다. 갑자기 그 녀석이 내게 말을 걸어올줄은 몰랐기 때문에 솔직히 당황했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답 정도는 하라고. 들렸잖아.”

아, 짜증나! 맨날맨날 무시하는 주제에 이제와서 거리낌없이 말걸지마, 하고 속으로 외쳤다.

“...칫.. 짜증나.” “뭐어?” 마치 대답을 안달하는 듯한 목소리가 친구와 외출 약속에 들뜬 내 기분을 순식간에 부숴갔다. 쳇, 나도 평소에 네가 나한테 했던 똑같은 태도로 무시할 거야. 말걸지 말란 말이야, 바보.

“너 오늘 밥은 어떻게 할 거야?” 응? 밥? 저번에 갔던 파스타 가게, 가기로 갈까?

... 아참, 순간적으로 저 녀석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다. 아차차 싶은 나는 네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고 자기암시를 했다. 날 부르는 소리를 들려온 귓구멍에서 반대쪽 귓구멍으로 흘려보냈다. 신경 따위는 쓰지않고 카톡에 열중했다.

“대답 하라고. 귀 먹었니?” 아~ 정말 귀찮게 하네. 내가 밥을 어디서 먹든지 너랑은 관계없잖아!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이대로 계속 입다물고 있어도 물러날 것 같지 않있다. 마지못해 나는 입을 열었다.

“시끄럽네... 먹을거야. 집에서.” 카톡 자판을 두들기며 대충 단어만 내뱉는 형식으로 대답을 끝냈다. 이제 저 녀석과 말 섞는 건 진짜 끝이야.

“쩝, 알겟다. 그럼.”

볼일을 다 본건지 그 녀석은 내가 앉아있는 거실을 뒤로한채 돌아서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응, 잠깐만? 내 용돈은?

“야.” 하... 진짜 눈치없다. 굳이 내가 저 녀석에게 먼저 말을 거는 상황을 용인해야하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왜?” 잔뜩 가시돋힌 목소리로 대답을 해왔다. 쳇, 자기 딴에는 화 났다는 건가?

“돈 줘.” “뭐?”

뭐냐니, 그럼 부모님이 주신 용돈 혼자서 꿀꺽할 생각이었던 거야? 정말 최악이다. 그 녀석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만원 지폐 세 장을 꺼냈다.

“식탁 위에 둔다.”

칫... 짜증나. 흥미고 뭐고 없는 주제에 단지 필요하기 때문에 할수없이 내뱉는 목소리. 나는 이 녀석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그 목소리가 가장 싫다. 듣고 싶지도 않은 목소리를 계속 들으며 모처럼 친구와 놀러나가려는 하루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다. 약속시간에 조금 이르긴하지만 빨리 집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성큼성큼 식탁 쪽으로 걸어가 식탁 위에 놓인 돈을 낚아챘다. 그리곤 식탁 옆에 엉거주춤 서 있는 녀석을 보고 말했다.

“방해야... 비켜.”

그 옆을 스치듯 지나가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냉수를 꿀꺽꿀꺽 마셨다.

“짜증나네.” 불쾌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하고 그 녀석은 방문이 부서져라 쾅 닫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보다시피 이게 나와 저 녀석의 관계, 도저히 함께 사는 가족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다. 조금 전의 대화도 지난 일 년간 저 녀석과 한 대화 중 가장 긴 대화축에 속한다. 평소에는 더 무시를 해서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하기 때문이다. 사이가 나쁘다는 단계를 넘어서,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젠... 하, 완전히 남이다. 아니, 남보다도 못한 관계다.

이제는, 어쩌면 사이가 좋았을지도 모르는 옛날의 일 같은 것도 모두 잊어버려서 모랫속에 파묻은지 오래다.

“죽어. 바보.” 내 방으로 돌아가며 나는 마음 속에서 생각하던 말을 입 밖으로 내 혼자 중얼거렸다. 방으로 돌아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으니, 방문 저편에서 또 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외출한다. 현관, 잠그지마.”

그러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부모님께 집보기를 부탁 받아놓고 또 어디를 갈 생각이지 저 녀석은? 아니, 그 이전에...

“여동생 혼자, 집에 내버려두다니 최악...”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닌, 혼자 투덜대는 나.

한숨을 쉬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저런 한심한 녀석 따위를 생각하는데 내 뇌세포를 낭비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집에서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가방을 손에 들고, 방문을 열고 현관에서 그제 산 예쁜 키높이 구두를 신고 나는 집을 닫았다.

찰칵하고 도어락을 닫고, 아무도 없는 집을 뒤로 하면서 나는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을 나와서 단짝 친구와 합류해 가게를 돌아다니며 수다를 떨고 있으니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바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우리 동네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탔다. 역에 내리자 어느덧 서쪽 하늘에는 석양이 깔리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석양의 주황빛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집에 부모님 안계신다며? 괜찮아?”

같이 걷던 친구가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푸우... 부모님도 집에 안계신데 좀만 더 놀다 들어가지. 생각해보니 너랑 저녁 먹은 기억이 없네. 통금 지킨다고.”

“그랬나...? 담에 한 번 같이 저녁 먹자. 꼭.”

습관이란 참 무섭다. 우리집 통금은 오후 6시이고 저녁식사 시간은 7시로 정해져있다. 오래전부터 그게 우리집의 규칙이었고 6시에 귀가해, 7시에 저녁을 먹는 습관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굳어져 있었다. 부모님이 안계시는 하루쯤은 밖에서 먹을 법 한데도 통금과 저녁식사 시간에 익숙해진 나의 본능은 더 놀고싶다는 욕망을 짓누르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이끌고 있었다.

“아, 오늘 밤에 비가 온다는 것 같아. 세탁물 밖에 내놓은 거 있으면 빨리 걷어서...” “정말, 걱정이 지나쳐! 그런 말이나 하고, 네가 내 엄마야, 아하하.” 역시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은 헤어지는 순간까지 즐겁다.

“아하하, 그런가. 암튼 아리야,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자.”

“그래, 조심히 들어가~.” 이런저런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서로 헤어져야하는 지점까지 왔다. 친구와 헤어진 후, 내 발걸음은 갑자기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졌다.

“후... 그 녀석이 있는 집에 꼭 가야만 하나...”

6시도 채 안된 시간, 자기 전까지 몇 시간을 그 녀석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심한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고갔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친구의 손을 붙잡고 밤새도록 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생각에 그칠 뿐, 관두기로 했다. 내가 집에 늦게 가거나 혹은 안들어간다면 분명 그 녀석은 부모님께 이 사실을 말할꺼다. 그러면 집에 부모님이 돌아오시는 부로 나는 매타작 예약이었다. 절대 피하고픈 미래, 아직 주위가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집에 돌아가야한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젠자앙, 그 녀석만 아니었어도!” 정말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녀석이다. 만약- 그 녀석이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나는 외동딸로 부모님의 온갖 귀여움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을텐데, 집이란 공간도 불편하게 지내야하는 공간이 아닌 정말 행복한 공간이 됐을텐데, 그리고 오늘처럼 통금 때문에 겁먹고 집에 일찍 들어갈 일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집에 돌아오니, 그 녀석은 부엌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는 척 하지 전에 후딱 방으로 들어갔다. 부엌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곧 저녁이 차려질 모양새였고 화장을 지우기 귀찮았던 나는 그대로 침대에 벌렁누워 씻기를 아예 저녁 먹은 후에 하기로 결정했다.

휴대폰으로 페이스북으로 친구들 게시글을 한참 눈팅하고 있을 때 방문에서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밥.” 목제 방문 넘어로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가? 슬쩍 시계를 봤다. 저녁 7시, 평소와 똑같이 저녁 먹는 시간에 맞춰 그 녀석은 저녁을 차린 것이다. 손을 잡고 크게 기지개를 켠 후 나는 방문을 열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 식탁 위에는 카레라이스와 김치를 비롯한 반찬 몇 종류, 그리고 엄마가 해놓고 가신 된장국이 놓여져 있었다.

각자 의자에 앉은 후 우리들은 상투적인 말을 입에 올리며 식사를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카레라이스를 먹었다. 평소에 엄마가 주시는 밥의 양과 똑같은 양이었다. 흠, 저 녀석... 내가 먹는 양을 지켜봤다는 건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어째서 이 녀석과 단 둘이서 밥을 먹고 있는 건지 의문과 동시에 오랫동안 그래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7시에 저녁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집에서는 지극히 ‘상식’이고 ‘습관’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머리와 몸, 특히 위장이 철저히 7시에 저녁을 먹어왔으니 설령 부모님이 부재중인 이런 상황에서도 7시에 저녁을 먹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이 불편한 녀석과 단 둘이서 함께 밥을 먹는 어색한 상황도 가능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물우물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옆에서 시선을 주고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신경끄고 밥이나 먹으면 됐는데 나는 그만 불편함을 감추지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 뭘 보는거야?”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뭔가 말하고 싶은 거라도 있는걸까?

“아니... 그냥... 가족 앞인데도 넌 화장을 하는 구나.”

“...응?”

에, 에? 어, 어째서? 어째서 너 따위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하는건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들 앞에서도 화장을 하는구나’와 같은 말은 비단 친구끼리 하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고마워, 귀엽고 멋진 모습을 보여줘서 기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자애들이 멋집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것은 자신을 칭찬해젔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물론 있지만, 상대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줘서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나도 그런 말을 자주 들을 뿐만 아니라 방금 전에 만난 친구와도 ‘오늘 귀걸이 이쁘네’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자주 듣던 말을, 절대 말할 리가 없는 상대로부터 들은 탓에 나는 무심코 얼떨결해졌다.

그렇지만 동시에 내가 품어버린 상상은 쓰레기 같은 착각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나를 향한 그 녀석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 없었으니까. 아마 분명 고등학생이 화장이라니 적절치 않아보인다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연상인 체하며 이제와서 오빠 노릇이라도 할 생각인건가?

“내 마음인데? 불만이라도 있어?” 가치돋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마치 아무 생각도 안했다는 듯이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그 가식적인 모습에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카레라이스 적당히 사왔는데, 이걸로 아침까지 먹을 수 있을까?”

내 쪽을 보지 않고 자기 몫의 카레라이스를 먹는데 집중하면서 굉장히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건네왔다. 질문을 묻는 의도가 뭔지 궁금했다. 뭐, 만약에 모자라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건데? 지금 마트가서 부족한 양 사올 생각이야? 이제 됐다. 더 이상 이런 녀석과 대화는 지속하고 싶지 않다. 하나하나가 마치 시비거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설사 그 녀석이 그런 의도는 없었다하더라도, 이미 그에 대한 나의 평가는 바닥을 넘어 내핵까지 도달할 정도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나한테는 시비걸지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들렸다.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나는 계속 밥을 먹었다. 그러자 그 녀석도 더 이상 말을 건네는 일은 없어져 부엌에는 우리 각자가 저녁밥을 씹는 소리만 들렸다.

불편했다. 말을 섞는 것도 불편하지만 아무 말도 안하고 침묵이 깔리는 이 상황도 불편했다. 정말 이 녀석하고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구나. 서로가 바로 옆에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멀어져버린 이 거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잘먹었습니다.”

빨리 이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이곳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 나는 남아있는 카레라이스를 한 입에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싱크대에서 먹은 식기를 대강 씻고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온 후, 지난주에 보지 못한 밀린 드라마 2편을 연달아 본 후 갈아입을 옷을 챙겨든 후 욕탕에 들어갔다. 모처럼 맞는 주말의 목욕이닌 만큼 샤워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뜨거운 욕탕에 한 시간 정도 몸을 담굴 생각이었다.

“후후, 그 전에-. 헤헤헤.”

나는 방에서 가져온 입욕제를 꺼내서 따뜻한 물을 미리 풀어놓은 욕조에 솔솔솔 뿌려 넣었다. 옅은 핑크색이 따뜻한 물 안으로 퍼져나갔고 곧 상큼한 꽃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헤헤, 기분좋다.” 은은한 분홍빛에 꽃향기가 품겨나오는 욕탕에 몸을 완전히 담군 나는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림을 느꼈다. 부모님이 부재하시는 바람에 평소엔 아는 척도 안하던 저 녀석과 몇 번 말을 섞어서 성가시긴 했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이제 목욕을 마치고 2주 정도 묵은 때를 벗긴 다음 못 본 예능이나 한 편 틀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얼마만에 느끼는 여유인지 빨리 수험생활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세계가 급변했다.

욕실 문 밖에서 우르르 쾅쾅하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찌릿하고 전류가 튀기는 소리와 함께 욕실 형광등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뇌가 무슨 사태가 일어났는지 판단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내 시야는 갑자기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다.

“뭐, 뭐야? 어, 어떻게 된거... 꺄악!” 밖에서는 쾅쾅거리며 한 번 더 큰 소음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득달같이 쏴아하고 세찬 빗소리가 어렴풋이 들여오고 그 다음 섬뜩한 바람소리가 창문과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화약이 터지는 소리처럼 비가 창문에 때려붙는 소리도 들린다.

“버... 번개가 떨어진거야? 어, 어째서? 태풍 같은 거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물론 아까 만난 친구가 밤에 비가 올 수도 있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이렇게 천둥번개까지 치면서 정전이 되어버릴 것까진 없잖아!

심한 정신적인 혼란감이 몰려왔다. 공포라는 본능이 이성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나는 머리를 싸매며 눈을 감았다.

어렸을 때부터 폭풍우나 천둥번개가 질색이었다. 본능에서 기인한 폭풍우, 천둥번개에 대한 공포는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에는 예보를 사전에 듣고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듣는다거나 이불 속에 들어가 일찍 잠자리에 드는 등 나름의 대비책을 세울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갑작스럽게 이 모든 것이 닥쳐왔다.

“시... 싫어. 나, 난 이런거 싫다고! 빨... 빨리 전기 켜줘어어... 싫어...” 무섭고 어두운 공포가 나를 잡아먹으려 한다. 차라리 빨리 일어서서 대충 몸을 닦고 방으로 갈까도 생각해봤지만 방에 돌아가도 어둠만 있을 터, 그리고 이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움직이는 건 나를 더한 공포 속으로 밀고 들어갈 것이다.

목덜미까지 목욕탕에 가라앉히고 눈과 귀를 막고 다리를 껴안 듯이 접어서, 나는 필사적으로 공포로부터 피하려 했다.

“이런건... 아니잖아... 살려줘...” 어렸을 때 경험했던 공포가 기억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그 때도 굉장히 무서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는 직장에 가셨고 엄마도 무슨 일인지 안계셔서 오늘처럼 집보기를 하고 있었을 때,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 꼬마였던 나는 절망해서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무서워하는 나를 안심시켜주기위해 부드럽게 팔로 꼭 껴안고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준 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손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빨리 폭풍우가 지나가버리길 기다렸지만, 비와 바람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정전이 되어 꺼져버린 형광등도 다시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작 십 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영원과도 같은 긴 시간이었다.

공포심을 억제하기위해 무리하게 마음 속에서 분노를 일으켜 비와 바람, 번개를 향해 큰 소리로 소리치려했지만, 그보다 더 큰 공포가 다시 밀려와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공포에 질린 어린 아이의 웅얼거림에 불과했다.

“...싫...안...돼...”

너무 무서워서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젠 눈가에서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였다.

“똑똑.” 갑자기 누군가 욕실문을 두들겼다.

“꺅... 누, 누구야?”

공포감에 질려있던 나는 욕실문을 두들겼을 누군가에게 반사적으로 큰 소리를 치고 말았다.

“으아앗!” 그러자 상대방도 놀랐는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누누구야? 거기 있는 사람 누구야! 드... 들어오지마 변태! 들어오면 죽일꺼야!” 평소와 같았다면 욕실문을 두들긴게 누구인지 충분히 알 법하지만, 공포로 인해 이성을 잃은 나는 아연실색해서 큰소리로 침입자에게 외쳐댔다.

“아... 아리니?”

“에엣? 아...”

맥 빠진 소리가 욕실 밖에서 들려오자 그제서야 나는 그게 누군지 겨우 인식했다.

“...뭐야, 너였어? 하아...”

노크를 한 사람이 잘~ 알고 있는 상대라는 것을 알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이 집에는 나와 그 녀석 밖에 없으니까.

“저, 정말! 놀라게 하지마!” “미, 미안해.”

돌발적인 사태가 내 뇌에 영향을 미친 탓인가, 나는 자연스럽게 입을 움직여 ‘평범’하게 그 녀석과 말하고 있었다.

“모, 목욕하고 있는데... 가, 갑자기 새까매져서...”

“그... 그러냐.” 마음이 진정되자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오려 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간신히 울음을 참았다. 하지만 눈에서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수가 없었다.

“전기... 안 들어오는 거야?” “...” 내 질문에 욕실문 밖에선 답이 없었다. 왜... 왜 대답을 안하지? 뭐, 뭔가 말하라고! 서... 설마 이 상황에서 무섭게 놀래키려는 건 아니겠지? 그... 그런 짓을 한다면 진짜 죽일 거야...

“... 진짜 거기 있는거 맞아? 있는거 맞지?”

울먹이는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울먹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상대방도 곧 대답을 했다.

“차단기를 올려봤지만, 전기는 들어오지 않더라.” “... 그럼 언제 들어오는데?”

“나도 모르겠어. 관리사무소에 전화해볼까?” 평소에 다르다. 평소에 다르게 뭔가 녀석... 아니, 오빠는 상냥하게 내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웅... 부탁할게...” 나도 자연스럽게 날이 선 것을 줄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평범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밖에선 곧 전화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스럽게도 정전에도 불구하고 기지국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았다. 곧이어 오빠의 상냥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관리사무소와 연락했어. 지금은 수리 중이고 30분 후면 전기가 다시 들어온대.”

“아... 하아... 다행이다.”

난 진심으로 안도해서 나지막히 대답했다. 비상 상황에서 듬직한 오빠의 모습을 보여주는 녀석에게 나는 조금... 아주 조금... 감동했다.

일단 서로 필요한 대화는 주고받은 후 우리 사이에는 다시 언제나처럼 침묵이 깔렸다. 하지만 그 침묵은 평소와 다른 어색함과는 조금 달랐다. 왠지 모를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 때 문 건너편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말해봐. 너 무섭지?”

“뭐...?” 정답, 이긴 하지만... 오빠에게 내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들켰다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분명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말로 대화만 주고받는 상황임에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따뜻한 물을 뒤집어써서 가뜩이나 붉어져있던 얼굴이 더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부끄러움을 감추기위해, 그렇지 않다는 듯이 크게 소리쳤다. 소리의 흔들림 때문에 욕탕의 수면에 가벼운 파동이 일었다.

“풉!” 그러자 건너편에선 갑자기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말 최악... 마치 놀림당하는 기분이다. 그것도 오빠한테...

“에? 왜... 왜 웃는거야! 나가면 진짜 죽일꺼야!” “아... 아냐. 큭큭. 미안해.”

“저... 정말! 너무해!”

평소의 우리였다면 절대 나누지 않았을 대화, 그랬떤 우리가 다른 평범한 남매들처럼 장난을 치며 대화를 나눴다.

“음, 지금 생각난 거지만, 이전에 우리가 어렸을 때도 벼락으로 정전이 되었던 적이 있었지 아마? 그 때도 너 막 당황해서 엄청 울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너 달래주느라 엄청 고생하고... 뭐... 그냥 그랬던 기억이 생각난다고.”

오빠의 그 상냥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건넨 말은 내면 속에 웅크리고 있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나와 똑같이... 오빠도...

어렸을 적 아련한 추억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우에에엥, 무서워! 엄마, 엄마! 번개 무서우어... 딸꾹.... 우에에에엥!” 나는 필사적으로 밖에 나간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괘, 괜찮다고 아리야! 이, 이 정도 번개는 끄덕없어. 엄마도 곧 돌아오시테니까. 자 울지마고 오빠 봐봐. 자, 안 무섭지? 무섭지 않다니까.” 자기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주제에 나와 같이 꼬맹이였던 오빠는 내가 울고있는 것을 달래주었다.

“우우... 그래도... 아직 번개가... 치고 있다고... 흑흑... 딸꾹...” “옳지 옳지. 괘, 괜찮아. 오빠가 이렇게 널 지켜주고 있는데 뭐가 무서워? 오빠가 있으니까... 계속 쭉, 이렇게 네 곁에 있을테니까.”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를 꼭 껴안아주는 오빠.

“딸꾹... 딸꾹...” 오빠의 따뜻한 품에 안겨 서서히 울음을 그치는 나.

“쭉 곁에 있을테니까. 울지마, 아리야.” 그리고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이야기도 하지 않고 오빠는 계속 나를 안아주었다.

 

그 ‘언젠가’처럼 우리 둘도 폭우가 내리는 밤에 욕실문을 사이에 두고 함께 있었다. 그 때의 기억과 달리 오빠는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서로를 의지한채 공포를 이겨내는 모습은 그 때와 똑같았다. 마음 한구석이 사무치게 아려왔다.

“저기... 아직 거기에 있어?” “응, 어어.” 어느새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오빠를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부드럽게 오빠를 불러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리야, 스마트폰 조명등 일단 켜둔채로 여기 놔둘게. 난 들어갈테니까...” 응? 뭐야? 들어간다고?

“아니...! 방에 들어가지 말고...” 오빠가 방에 돌아간다는 게 싫었다. 다시 떨어지는게 싫었다. 어둠 속에 다시 혼자가 되는게 싫었다.

“응?”

“여기 있어줘. 오빠... 나 너무 무서워...” 솔직하게, 솔직하게 내 감정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나는 근 몇 년만에 처음으로 그 녀석을 ‘오빠’라고 불렀다.

“알았어... 불이 다시 들어올 때까지 여기 있을께.”

“응... 고마워.” 아무렇지도 않게 오빠와 살짝 낯간지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평소에도 늘,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듯이 우리는 따뜻하게 말을 주고 받았다. 분명 몇 시간, 아니 한 시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쉽사리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저기... 오빠.” “응?” 다시 ‘오빠’를 부른다. 오빠, 오빠... 기억 속에는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부르는 단어였다. 아마 다시는... 저 녀석을 이 단어를 사용해 부를 일이 없을꺼라 생각했는데...

“그거 기억나? 나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오빠가 나한테 초등학교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줬던거... 유치원 졸업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복도에서는 뛰지 말라 그러고, 점심은 교실이 아닌 식당에서 먹으라고 하고, 중앙계단은 사용하지 말라고... 그랬던 거...”

자연스럽게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오빠와의 옛 추억을 털어놓았다. 내 기억 속에 있는 듬직하고 자상한, 의지할 수 있는 오빠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추억이었다.

“풉,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지.”

기억하고 있었구나... 오빠도 기억하고 있었어... 그 때... 우리가 그런 적도 있었다는 걸... 오빠도 기억하고 있었다. 흥... 평소에 관심없는 척, 무시해오면서 그래도 옛 추억들을 까먹거나 그러진 않았구나. 오빠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다. 오빠도 내가 조금은 가깝게 느껴지는지 다시 질문을 해왔다.

“우리... 왜 이렇게 된걸까... 분명 어렸을 때는... 친하게 지냈던걸로... 기억하는데...” 오빠는, 남보다도 못한 우리 남매 사이가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에서 기인한 질문을 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뭔가 사이가 틀어진 계기가 있을법도 한데 내 기억 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오래전부터 오빠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도로만 생각이 나지, 왜 우리 사이가 틀어졌는지,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무엇을 계기로 심하게 다툰 후 서로 토라져서 화해할 타이밍도 놓쳐버려서, 이대로 쭉 몇 년간 냉전 상태로 지내온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 뿐, 정확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그건...”

조심스럽게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위해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파팟!” 전기가 켜지는 소리와 함께 주이가 갑자기 환해졌다.

“으앗.”

어둠에 적응한 눈에 갑작스럽게 불빛이 들어왔다. 황급히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이미 잔상은 망막에 남은 채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체감상 30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수리가 빨리 끝난 모양인지 형광등이 예고없이 밝아졌다.

불이 켜지고 욕실 내부가 명확히 보이기 시작하니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오빠랑... 무슨 대화를 나눈거지? 갑자기 미친 듯이 부끄러워졌다. 아까처럼 얼굴이 벌개지는 게 느껴졌다.

“에... 그러니까...” 당황해서 어버버 거렸다.

“아리야, 뭐라고?”

방문 밖에선 나의 어버버거림에 오빠가 뭐라고 반응해온다. 하지만 이미 쪽팔림과 부끄러움이 한 곳에 뒤섞인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목욕탕 나갈테니까 빨리 방에 들어가버려!”

부끄러움에 대한 방어기제로 있는 힘껏 소리를 쳐버리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야! 아직도 있는거야?” “네에네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오빠도 다시 그 특유의 맥 빠지는 목소리로 돌아와있었다. 밖에서는 오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가 어깨가 힘이 빠진채 터덜터덜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평소라면 질색했을 오빠의 힘빠진 모습이었겠지만, 오빠의 속마음을 알고난 지금은 내가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나 싶어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으...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야...”

욕탕에서 일어나 배수구를 열어 욕탕의 물을 빼고 샤워를 한 후 온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와 오빠방 문 앞에 섰다.

앞으로 이 방문을 노크할 일은... 다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똑똑.” 심호흡을 한 후 오빠 방문을 두들겼다.

“왜?”

안에서 오빠가 물었다. 음, 문 열어도 되겠지?

방문을 열었다. 근 몇 년만에... 처음 보는 오빠의 방이었다. 생각했던 것치고는 제법 말끔해서 놀랐다.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삐쭉 내밀어 영문을 모른채 나를 보고있는 오빠와 시선을 마주쳤다.

“뭐! 또 할 말 있어?”

아까 내가 소리친 것 때문에 혹여나 상처 받아 풀이 죽어있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했던 내 생각을 무참히 깨뜨리기라도 하듯이 오빠는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닥쳐! 그냥 들어.”

아, 정말. 그냥 곧이곧대로 들으면 될 것을 나도 날카롭게 반응하고 말았다. 이래선... 제대로 내 마음을 전할 수 없게 되잖아.

“저기... 고마웠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정말 간신히 내 속마음을 오빠에게 털어놓았다.

고마웠다. 나는 오빠가 고마웠다. 갑작스런 정전에 욕실에 갖힌 채 공포에 떨고 있던 내게 다시 손을 내밀어준 오빠가 고마웠다. 곁에 있어준 오빠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쾅!” 부끄러운 나머지 내가 하고싶은 말만 하고 방문을 쾅 닫고 오빠 방을 나왔다. 다시 내 방에 들어와선 침대에 들어눕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갑자기 내가 왜 이러는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이틀 후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어제부로 짧았던 여름방학도 끝나고 말았다. 다시 학교에 등교할 준비를 하기위해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가방을 챙기고 교복까지 입은 후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먹기 시작하고 잠시후 오빠는 헐레벌떡 내 옆에 앉아 정신없이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흠, 아침부터 아르바이트라도 갈려는 걸까? 그나저나 무언가 쫓기듯 급하게 밥을 먹는 오빠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나왔다.

“야, 누가 쫓아오냐? 천천히 좀 먹어.”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오빠에게 장난을 던졌다. 순간 오빠는 내가 먼저 말을 걸어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시끄러. 아르바이트 늦었다고.”

역시, 아르바이트일꺼라 생각했다. 대학교의 개강은 아직 멀었으니까.

“으이그. 그러게 빨리 좀 일어나지, 게을러 터져갔고.” “뭐래는 거야. 이 고삐리가.” 오빠와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물론, 살가운 대화는 아니었지만 분명 지난주까지만 해도 서로를 무시하던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다.

“호오, 둘이 좀 친해졌나보네?” 엄마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에에? 그런 거 아니거든!”

아직까진 오빠와 조금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속마음과 정반대의 말을 하고 말았다.

“친하긴 무슨...”

오빠도 엄마의 질문에 퉁명스럽게 답한다. 오빠의 퉁명스런 답이 오빠의 본심인지, 아니면 나처럼 부끄러운 감정을 감추기위한 위장인지 잘 모르겠다.

“호호, 너희 엄마아빠 없는 주말을 같이 보내면서 제법 친해진 모양이네? 너희가 너무 안 친해서 솔직히 걱정 많이 했는데, 앞으로는 아빠랑 같이 자주 집 비워야겠다. 너희 더 친해지라고.” “무슨 소리야!”

나와 오빠가 동시에 소리쳤다.

“오빠 따윈 정말 싫거든!” “동생 따윈 정말 싫거든!”

서로 질세라 먼저 오빠, 동생이 싫다고 외쳤댜. 그러고보니 서로의 말이 정확히 겹쳐졌다.

“봐봐, 벌써 통하는게 있네.”

엄마는 웃으면서 우리를 놀려댔다. 엄마가 놀릴 때마다 지난 밤에 있었던 오빠와 욕실 문을 가운데 두고 나눴던 낯간지러운 대화가 떠올랐다.

“이런, 엄마. 나 아르바이트 늦었다! 먼저 갈께!” 진짜 아르바이트에 늦은건지, 아니면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건지 오빠는 먼저 일어섰다. 음... 뭐야... 나랑 같이 가기 싫다는 건가?

“으앗! 엄마, 나도 학교 늦겠다. 갔다올께!”

오빠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나도 총알처럼 엄마한테 학교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가 대답하는 것을 듣지도 못한채 무작정 현관으로 뛰어가 신발을 갈아신고 현관문을 열어제쳤다. 그러자 시야에는 막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오빠가 보였다.

“기다려!”

헐레벌떡 뛰어와 엘리베이터에 뒤따라 탔다. 후... 아침부터 뛰어다니니 꽤 힘들었다. 나는 숨을 할딱이면서 바지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너, 뭔데 나 따라다니냐.” 그러자 엘리베이터 옆에 서있던 오빠가 말했다. 날이 섰다기보단...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다.

“뭐래. 난 학교 가는거거든.” 마치 친구와 대화나누는 것처럼 가볍게 맞받아쳤다.

“학교를 왜 벌써 가?”

“고등학교는 벌써 개학했어요~. 이 바보야!” 쳇, 여동생이 다니는 학교가 언제 개학하는지도 몰랐나보지? 진짜 이 바보 오빠같으니라고. 바보란 말을 들어도 솔직히 싸다고 생각한다.

우리 남매가 이런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섰다. 문이 열리기 직전, 나는 오빠한테 혀를 내밀고 메롱하고는 냅다 뛰었나갔다. 칫... 바보 오빠따위는 제쳐두고 먼저 학교 갈꺼다, 뭐.

그러자 뒤에서 오빠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먼저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나를 금방 따라잡았다. 내 바로 옆까지 달려온 오빠에게 한마디 던져줬다.

“너 뭔데 계속 나 따라오냐. 재수없어!”

“웃기고있네. 나도 아르바이트 가는 거거든? 따라오는 건 너야 너.” 서로에게 가시돋힌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서로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아는 척도 안하던 불과 며칠 전과 비교하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오빠와 친해진게 아닐까... 아마 내가 모르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서는, 오빠와 다시 친하게 지내고싶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나보다. 정전 때 먼저 다가와준 오빠의 모습이 그 잠재의식을 끄집어 내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서로에게 독설을 내뱉는 것으로 친근감을 표시하는 우리지만... 이런 식으로 서로 간의 거리를 서서히 좁히면서 친해지다보면, 오래 전 나와 오빠 사이를 갈라놓은 ‘어떤 사건’이 기억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밤 있었던 정전 사태 때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옛 기억들을 끄집어냈기 때문에 더 오빠와 이야기하고 가까워지다보면 그 ‘어떤 사건’이 우리의 의식 위로 부상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만약 그 사건이 나의 잘못으로 인해 초래돼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된거라면, 오빠한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친했던 옛날의 우리로 돌아가고 싶다.

어느새 나는 아파트 정문을 지나쳐 큰 길의 버스정류장까지 왔다. 마침 우리 학교까지 가는 버스가 막 정류장에 도착했다. 출근하는 직장인과 등교하는 학생들을 한꺼번에 태운 버스는 이미 만원인 상태였지만, 다음 버스를 기다리긴 싫었기 때문에 올라탔다. 간신히 자리를 잡은 후 주위를 둘러보자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뭐야 너 왜 여깄어?” 오빠였다.

“진짜 나 왜 따라오는거야?” “너 따라오는거 아니래도. 나도 이 버스가 나 아르바이트 하는 곳까지 간다고.” “네에네에 그러시겠지.” 그 때 버스가 급정거라도 했는지 앞뒤로 세게 흔들렸다.

“아앗!” 흔들리는 사람들에 떠밀려 중심을 잃었다. 그 때 오빠가 내 손을 잡았줘 간신히 넘어지는 상황을 모면했다.

“야야, 조심해라.” 놀래서 오빠를 봤다. 오빠는 온화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온화한 눈빛에서 오빠로서 당연히 동생을 챙겨야겠다는 의무감이 보였다.

“고마워, 오빠.”

“응? 뭐라고?”

버스 안의 소음이 제법 커서 나름 큰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오빠는 듣지 못했나보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오빠는 내가 한 소리를 못알아듣고 어깨를 으쓱했다.

“흥, 아무것도 아냐!”

머쓱해진 나는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준 오빠의 손을 꽉 맞잡았다.

다시 잡은 그 손, 두 번 다시 놓치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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