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비행

 

 최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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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공감할 수 없다.’

 

어릴 적에 만났던 한 소년이 내게 했던 말이다. 공교롭게도 소년을 처음 만났던 날은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비가 하염없이 내릴 때면, 가끔은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오래된 추억들이 깊은 곳에서 아련하게 새어나와 자신도 모르게 묘한 미소를 짓게 되고는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가 처음으로 하늘을 날기 시작했던 그 시절,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어릴 적에 병약했던 데다가 울보이기까지 했던 나는 너무 아플 때마다 엄마의 무릎에 파묻혀서 울음을 터뜨리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따스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를 달래는 노래를 불러주고는 했는데, 아주 어릴 적이지만 엄마의 노래는 무척이나 나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그제야 나는 보채던 울음을 멈추고서, 그녀의 무릎을 베고 행복한 표정으로 스르르 잠이 들었고, 그 때의 기억이 아름답게 남아 노래라는 것은 내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특히나 엄마가 병으로 내 곁을 일찍 떠나버린 뒤에는 더더욱 말이다.

 

‘미안해.’

 

눈 밑에 퀭하니 그림자가 지고 입술이 바짝 마른 채로 엄마는 지어지지 않는 미소를 애써 지어보였다. 5살이었던 나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그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의 무게에 대해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고, 아빠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거운 표정을 한 채 눈물을 흘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다들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엄마는 그냥, 조금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한 것뿐인데.

 

나는 엄마가 멀리 가면 내가 아플 때 노래는 누가 불러 주냐고 물었고, 나의 그런 천진난만한 질문에 엄마는 잠시간 어안이 벙벙해진 듯 눈을 깜빡였지만 이내 안심하라는 듯이 내 뺨을 살포시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에서야 기억나는 거지만, 뺨에 닿은 엄마의 손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은서가 아플 때마다 엄마가 노래를 불러줄게. 은서가 아프지 않게.”

“정말?”

“응, 그럼.”

“멀리 있어도 들리는 거야?”

“진심을 다하면 거리가 멀어도 닿을 수 있으니까.”

 

엄마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가 꼭 하늘나라에서 은서 들으라고 노래를 불러줄게. 약속.”

 

수척해진 엄마의 미소를 보며 나는 그저 해맑게 웃었고,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참 뒤에 내가 한 번 크게 아파 앓아누운 적이 있었는데,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 엄마의 말대로, 진심이 하늘에서부터 닿은 것인지는 몰라도 내 귓가에 거짓말처럼 어릴 적 엄마가 내게 속삭여주던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안 있어 나는 금세 낫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때부터 나는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저 우연에 불과한 일일 것이다. 아픈 나머지 환청을 들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어쩌면 그것이 합리적인 생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내게 하나의 꿈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하늘에 닿아 엄마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내가 직접 만든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고, 그 노래가 하늘에 있는 엄마에게까지 닿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언젠가부터 나의 유일한 꿈이자 삶의 목표였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할 때마다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건 천박한 술집여자나 하는 짓이라며 아빠는 경멸이 섞인,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내가 어렸던 시절만 하더라도 실제로 가수는 일종의 광대 취급을 받는 것이 일쑤였다. 아빠는 내가 거리의 가수 같은, 아빠의 표현대로 하자면 발칙한 것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좀 더 고상한 것을 공부하기를 원했다.

굳이 음악을 꼭 해야겠다면 바이올린 같은 고상한 – 물론 모두 아빠의 기준이었다. – 악기 연주나 그도 안 되면 피아노나 성악 같은 것들 말이었다.

아빠는 내가 대학에 가서 문학을 전공하기를 원하셨는데 그것이야말로 여자가 배울 수 있는 것들 중에 최고로 고상하고 여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수 같은 걸 할 거라면 내가 뭐하려고 딸을 대학에까지 쓸데없이 보내려고 하겠냐며 아빠는 고집을 꺾지 않는 내게 일갈하고는 했다. 그 시절에는 여자가 대학에 가는 일이 극히 드물었음에도 아빠는 나를 반드시 대학에 보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아빠의 유일한 가족임과 동시에 아빠가 나를 무척이나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아빠의 일방적인 방식을 전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빠의 나를 향한 사랑은 언제나 제멋대로이고 강압적이었으며 일방적이었다. 아빠는 자신이 생각했을 때 내게 있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비용을 따지지 않고 실행하려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나의 대학 진학도 그러한 것들, 그러니까 내게 도움이 되는 것들의 일부였다. 아빠는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고, 반대로 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내게서 떨어뜨려놓거나 제거하려고 했는데 그런 아빠의 성향은 가끔씩은 광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 그것은 돈이 없어서 엄마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보내야만 했던 아빠 나름대로의 죄책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엄마가 내 곁을 떠나기 전, 어릴 적 기억 속의 아빠는 지금과 같은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빈털터리인 하급 장교였을지언정 잘 웃고 꿈이 있고 따스한, 그것이 내가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아빠에 대한 기억의 파편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정다감했던 성격은 말 수가 없는 차가운 성격으로 변해버렸고, 눈빛은 차가워졌으며 독기가 넘쳐흐르게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그 뒤로 한 번도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빠에게 기대어서 힘들다며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아빠가 무서웠다. 그 감정 없는 눈빛이 너무나 낯설었다. 사실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지만, 내가 알았던 어린 시절의 아빠는 이미 그 때 엄마와 함께 죽어버렸던 것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년이 지난 후 5월의 어느 봄날, 집에 일주일 넘도록 돌아오지 않던 아빠는 갑자기 군복에 보지 못하던 낯선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서 나타났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풍족하지도 않았던 집에는 갑자기 유모와 하인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내게는 최고급의 음식과 옷들이 주어졌다.

 

라디오에서는 몇 주 동안이나 용감한 군인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상대로 일으켰다는 구국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지겹도록 흘러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아빠가 그 혁명이라는 것의 주역으로 가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아빠 외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던 우리 집에는 갑자기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는 아빠에게 요즘 날씨가 어떠니 같은 쓸데없는 얘기를 장광하게 늘어놓다가 이내 무언가 봉투라든지 거대한 가방을 아빠에게 내밀고는 했고 아빠는 한참이나 거드름을 피우다가 그것을 탁자 아래로 슥 집어넣고는 했다.

뿐만 아니라 아빠는 어느 날부터 낯선 여자들을 집에 데리고 오기 시작했다. 그 날도 아빠는 낯선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검붉은 단발머리에 진한 붉은 립스틱, 벌써 술이라도 한 잔하고 온 건지 얼굴에 한창 홍조가 올라있던 그녀는 현관에서 나를 보더니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녀의 아는 체를 본체만체하고 2층의 내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쿵 소리가 나게 닫았지만 아직도 밑에서는 이따금씩 시시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급하고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웃음소리를 더 이상 듣기 싫어서 나는 얼굴을 온통 베개에 파묻고서 귀를 꼭 틀어막았다. 왠지 모르지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저 빨리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생각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한때는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과 같이 지내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없이는 나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존재 자체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창문을 열어놓았는데, 바깥은 너무나도 깜깜했고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어느새 밤이 깊은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아빠의 방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귀신 소리인줄만 알고 흠칫 놀랐는데, 자세히 들을수록 무슨 소리인지 분명해졌다. 무척이나 음란한, 여자의 쾌락에 가득 찬 신음소리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해, 애가 깨겠어.’

 

혐오스러움과 구역질나는 감정을 애써 뒤로한 채,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계단 위로 올라와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아침이 되어 거실로 내려오자 여자는 어느새 사라져있었고, 아빠는 거실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근엄한 표정을 한 채로,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은서야.”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일어서는 나를 불러 세우며 아빠가 말했다.

 

”네.”

 

나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직도 가수인지 뭔지 하는 딴따라 같은 걸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냐.”

“네.”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건 천박한 술집여자나 하는 짓이다.”

 

아빠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건 아빠의 습관이었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한다고 생각할 때면 아빠는 그렇게 늘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시작하고는 했다.

 

“아빠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제 그만 허튼 생각은 집어치우고 좀 더 품위 있는 걸 공부할 생각을 해라.”

 

예의 근엄한 표정을 계속 지은 채로 아빠는 커피를 홀짝 한 모금 마셨다.

잠시간 입술을 앙다물고 아빠를 노려보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을 까딱인 채 힘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위선자.’

 

아빠를 엄마가, 내 기억 속에 아름다움과 선함, 그리고 상냥함으로만 남아있는 엄마가 사랑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전 같으면 핏대를 세우며 열심히 말대꾸라도 해봤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말을 섞고 싶지 않았거니와 말대꾸를 해봤자 어차피 아빠의 생각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품 안에 있는 한,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결국에는 아빠의 손아귀에 억지로 이끌릴 것이다. 늘 그랬듯이, 아빠는 그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어린 내게는 이곳에서 벗어날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나서 집을 나가고 싶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쓰레기 같은 짓들을 다 알고 있노라고 말하고서, 당황함과 부끄러움과 모욕감에 얼굴이 벙 찐 그를 비웃고서 자유롭게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직 너무나도 어렸고 아빠의 품, 너무나도 혐오스럽지만 무엇보다도 안전한 그 품을 벗어나 혼자서 세상으로 나설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빠에게 드는 감정 그 이상으로, 그렇게 약해빠지고 겁쟁이인 나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방문을 열자, 방안에서는 아까 일어나서 켜놓은 라디오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침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는지 라디오 속의 남자는 한껏 상기된 것 같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떠들어댔다.

 

‘인류가 만들어낸 하늘을 나는 기계가 창공 너머로 활보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제 인류는 한 단계 더 도약하여...’

 

손을 뻗어 책상 위에 놓여있는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일순간 거짓말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멍하니 서있던 나는 문득 방안에 우두커니 서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전신거울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마냥 나 자신을 온통 비추고 있었다. 거울에 비쳐진 창백한 얼굴, 까만 머리와 까만 눈동자. 하나같이 내 모습 같지가 않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문득 그 모습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작은 꼭두각시 인형 같이만 느껴졌다.

나는 모든 것에 지친 사람마냥 창가에 기대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가 오려는지 구름은 하늘을 덮고 있었고 그런 풍경이 나의 우울한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에 아빠가 대문 밖으로 나서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냉소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산책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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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아마 한참동안 걸었던 것 같다.

고개를 숙이고 걷던 나는 얼굴에 차갑게 떨어지는 무언가를 느끼며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낯선 건물들뿐이었다. 생각에 잠겨 멍한 채로 한참 동안 걷다보니 집에서 너무 멀리 나와 버린 것이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새 점점 더 많이 얼굴을 적시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비가 올 것 같이 하늘이 꾸물꾸물했으니까 이렇게 멀리 나올 거였으면 우산을 챙겼어야 했는데. 우산 좀 챙기는 게 뭐가 귀찮다고 혹시나 하는 일말의 생각에 희망을 걸었을까. 정말이지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아침에 라디오에서 들렸던 남자의 말, 하늘을 나는 기계에 관한 이야기가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라디오 속의 목소리는 그것을 ‘비행기’라고 불렀다. 하늘을 나는 기계라니, 그런 것은 꿈속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다면 땅위의 사람들도 하늘위의 새들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걸까.

하늘 위로 날 수 있게 된다면, 그곳에는 다른 세계가 있을까.

하늘 위에서 본 세상은 어떤 느낌일까.

엄마가 했던 말대로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은 하늘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까.

그렇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혹시나... 엄마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자 심장이 갑자기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내 걸음은 마치 뛰는 것 마냥 빨라졌다. 비에 흠뻑 젖는 지도, 어디로 가는 지도 잠시 잊은 채, 주변에 무엇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지도 눈치 채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리던 것은 그런 생각들에 푹 빠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빠아아아앙!’

 

갑자기 귀를 찢을 것만 같은 경적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서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휙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는 눈앞에 거대한 화물차가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제야 나는 내가 차도 위를 보행자 신호가 아닌데도 걷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석상마냥 그 자리에 바보같이 굳어있었을 뿐이었다.

 

화물차의 전조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란색 불빛이 시야를 온통 하얗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몸을 움직여 피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돌처럼 굳어버려 떨리는 다리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누군가 도와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간절한 외침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굳어버린 입술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점점 다가오는 차의 전조등으로 눈이 부셔와 온통 세상이 하얗게 밖에 보이지 않았을 때, 나는 죽음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무언가가 내 팔을 휙 잡아끄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그 힘에 끌려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넘어지자마자 화물차가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며 내 바로 앞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놀라 가쁜 숨을 내쉬며 그대로 주저앉아있을 뿐이었다.

 

“괜찮아?”

 

나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머리 바로 위에서 한 남자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그는 까만 머리에 약간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잘생기기는 했지만 여타 다른 소년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말이었다. 나를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는 놀랍게도 루비와도 같은 맑고 투명한 붉은 색이었다. 사람의 눈동자가 그런 색깔을 가질 수 있나 싶어서, 한참동안을 넋을 잃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다친 데는 없어?”

 

나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를 내서 대답하려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엉덩방아를 찧은 나머지 엉덩이도 너무 아팠고 발목도 조금 삔 것 같이 얼얼했다. 주변에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지 모여들고 있었다.

 

“빨간불인데 도로 사이로 그렇게 멍하니 뛰어가면 어떡해. 하마터면 저승구경 할 뻔 했잖아.”

 

남자애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고 해보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경련이 일어난 것이었다.

 

“못 일어나겠어?”

“...응.”

 

후들거리는 다리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애가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고, 왠지 그러고 있는 내 모습이 창피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물었다.

 

“놀라서 경련이 일어난 거 같은데. 크게 다친 데는 없지?”

“그냥 엉덩방아 찧어서 아픈 거 빼고는 별로 안 다쳤어. 네 말대로 그냥 조금 놀라서 그런 거 같아.”

 

나는 주저앉은 채로 원망스럽게 떨리는 다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괜찮아. 조금만 앉아있으면 혼자서 일어날 수 있을 거 같아.”

“정말?”

“응, 정말로. 혼자서 일어날 수 있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또래의 남자애한테 멍청한 짓을 하다가 구해진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였을까. 나는 내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다리를 파르르 떨고 있으면서 애써 괜찮은 척하는 내 모습이 더욱 처량해 보여서일까. 뭘 생각하는 건지 모를 눈빛으로 남자애는 잠시간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자.”

 

그는 갑자기 내 옆에 쭈그려 앉더니 쓰고 있던 까만 우산을 내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가 내 곁에 앉는 바람에 그의 얼굴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그의 눈동자는 더욱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웃기는 일이지만 나는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미안한데 내가 정말로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조금 늦어버렸거든. 이거 쓰고 있다가 괜찮으면 집에 가. 혼자 못가겠으면 주변 사람들이라도 불러서 도와달라고 하고, 알았지?”

 

마치 달래는 것 같은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내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는 싱긋 웃으며 일어나서 빗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우산도 쓰지 않고서 말이다. 나는 한동안 뒤돌아서서 비를 맞으면서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맙다는 말도 미처 못 했다는 것을 말이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못했는데...’

 

주위에 웅성거리며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어느덧 다가와 내게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봤지만,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 후로 얼마간 더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밤이 어둑어둑 해질 때가 되어서야 절뚝거리며 집에 돌아왔고, 무릎이 까지고 옷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서 문 앞에 나타난 나를 보고 유모가 뛰쳐나와 한동안 소란을 피웠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냥 길가다 넘어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는지 유모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저 살며시 웃을 뿐이었다. 어느새 소년에게 받아들었던 까만 우산을 우산꽂이에 집어넣고서, 2층의 내방으로 올라온 나는 침대에 뛰어들 듯이 드러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까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정말이지 잠깐 사이에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그 붉은색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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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는 잦아들고 어느새 봄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입학식을 하게 된 건 그 사건이 있은 뒤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것에 대해 기억나는 유일한 기억은 엄청나게 길고, 따분하고, 지루했다는 것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가 기지개를 쭉 펴던 나는 급기야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왠지 모르게 낯익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저 뒤편에 앉아있는 다소곳이 앉아있는 남자애의 모습을 나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몇 달 전에 사고로부터 나를 구해줬던 그 소년이었다. 소년의 눈동자는 마치 온통 새하얀 모래사장 안에서 홀로 붉게 빛나는 보석처럼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가 힐끔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하자마자 뒤로 젖혀있던 고개를 휙 들었다.

 

‘나를 봤을까?’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마냥 콩닥콩닥 뛰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반을 확인하러 들어가자마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은 반이 된 아이들을 모두 둘러보았지만 그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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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시간은 또 흘렀고 어느덧 벚꽃이 필 즈음의 계절이 되었다. 그 동안 한 번도 그 남자애를 마주치지 않았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개학한지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벌써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던 것이었다. 비록 굳이 따지자면 조금 안 좋은 쪽이었지만 말이다.

 

“너 그 소식 들었어?”

 

짝꿍인 지혜가 편의점에서 사온 빵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종종 급식이 먹기 싫으면 편의점에서 빵 같은 것들을 사서 옥상에 올라와 먹고는 했다. 나는 음료수를 빨대로 한 번 쪽 빨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뭘?”

“걔, 8반 담임이랑 또 엄청 싸웠대.”

“걔가 누군데?”

“누구긴 누구야. 그 눈동자가 새빨간 남자애지. 또 사회 시간에 J시에서 일어난 그 사건에 관한 일로 싸웠대. 글쎄 그 사건이 정부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그랬다지 뭐야.”

 

지혜는 끔찍하다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J시에서 일어난 사건. 흔히 ‘J시 사태’로 알려져 있는 그 일은 몇 년 전 남쪽에 있는 J시라는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혁명이 일어나고 난 직후의 어수선한 시국을 틈타 J시에 침입한 A국의 첩자들이 J시의 시민들을 선동했고, 결국 폭동이 일어났다가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알려진 사건이었다.

 

“정말이지 소문만 들어도 무서워 죽겠다니까. 소문에는 그 남자애가 A국의 첩자일 수도 있다고 그러던데, 정말이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요새는 그런 것도 많다고 하잖아. 그 미성년자들을 의심 안 받도록 첩자로 만들어 보내는... 하여튼 찝찝하게 학교에서 그런 애를 왜 받아줬는지 모르겠어.”

“쓸데없는 걱정이야.”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소문은 보통 헛소문으로 끝날 때가 대부분이니까.”

 

딱히 내가 그 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저 말 그대로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이상 소문은 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미온적인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지혜는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 하지만 걔를 봐봐. 실제로 날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잖아. 개학한지 한 달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걔랑 마찰을 안 빚은 선생이 몇이나 될 거 같아? 게다가 저번에 옆 반 아는 애가 그러는데, 밤이면 학교 근처에서 이상한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는 걸 봤대. 걔가 가고 나서 슬쩍 보니까 불온한 내용이 담긴 선전물이었다는 거야. 정부를 전복시키자고 한다든지, 몇 년 전 J시에서 일어난 사태가 조작된 것이라든지.”

“정말 네 말대로 그렇다면 왜 선생들이 그 애를 퇴학시키지 않는 거야? 심지어 내가 듣기로는 그 애는 선생들한테 맞지도 않는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 애가 애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선생들이 더 열의를 가지고 처리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그게 더 무서운 거지. 지금 뭔가 선생님들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게 틀림없어. 저번에 8반 담임이 자기한테 대들었다고 남자애 하나를 대걸레가지고 죽도록 팬 얘기 들었지? 그렇게 성깔이 어마무시한 놈인데 그 애한테는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하고 손끝하나 못 댔다는 거야. 그러니까 더 무서운 거지. 분명히 뭔가가 있어.”

 

지혜는 마치 자기가 명탐정이라도 되는 듯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바닥을 바라보면서 문득 생각에 잠겼다. 정말 아이들이 추측하는 것이 맞고 소문이 진짜일까? 확실히 소문만 들으면 의심 가는 데가 많기는 했다. 하지만, 물론 사람을 한 번 본 인상만으로 평가하는 일은 굉장히 우스운 일이지만, 적어도 그녀가 봤을 때의 그는 전혀 아이들이 말하는 그런 식의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고민을 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늘 해오던 방식대로 계속하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본 것만을 믿는 것.

 

#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났다. 내가 다니던 H고교는 흔히 말하는 미션 스쿨이었는데, 강당이 있는 건물 1층과 2층 부분은 입학식 같은 행사에 사용되는 대강당이 자리하고 있었고 지하에는 매점, 3층에는 미사를 위한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남자애를 우연히 보게 된 것은 점심시간에 매점에 가기 위해서 강당이 있는 건물에 들어서던 때였다. 비록 멀리서 빠르게 지나갔지만 옆모습만 봐도 그 애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는 무슨 일인지 성당을 향한 계단으로 막 올라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문득 나는 예의 그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느낌을 다시 느꼈다. 그 두근거림은 마음이 드는 이성을 만났을 때의 설렘 같은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뭔가 미지의 무언가를 만났을 때의 호기심이랄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장소로 떠나기 직전 느끼는 두근거림 같은 것이었다.

그가 계단 위로 사라지고 난 뒤, 나는 잠시간 고민하다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즈음 위에서 무언가 아름다운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피아노 소리였다. 계단을 계속 올라갈수록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계단을 한참동안 올라가자 성당 입구의 유리문이 보였고, 유리문 안쪽으로는 성당 내부가 훤하게 비쳐져보였다. 여러 가지 색유리로 장식된 성당 내부는 매우 아름다웠다. 성당의 맨 안쪽 가운데에는 신부님이 미사를 하실 때 서계시는 것 같은 단상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 예쁜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었다.

 

‘그 애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남자애는 내가 보고 있는 걸 모르는지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나는 유리문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짝 열어젖히고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피아노 소리가 훨씬 선명하게 들렸다. 무슨 곡인지는 몰랐지만 상당한 실력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옛 추억이 떠오를 것만 같은 잔잔하면서도 아련한 곡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느새 눈을 감고 피아노곡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어느새 연주를 멈추고 이쪽을 어딘지 모르게 경계어린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그만 손을 휙휙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그냥 피아노 소리가 너무 예쁘게 들려서 올라와 봤는데... 불편했다면 미안. 딱히 방해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

“그래?”

 

그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또 이상한 질문을 하거나 시비를 걸러 온 줄 알았지. 너무 퉁명스럽게 말해서 미안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요새 그런 녀석들이 많아서. 나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많이 돌아서 그런가봐.”

“이상한 소문? 네가 무슨 A국의 첩자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그런 거 말이야?”

“뭐야, 너도 아는구나?”

 

일순간 나를 바라보는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다시 경계의 눈빛을 띠었다.

 

“너도 그렇게 믿니?”

 

나는 그것을 눈치 채고서 황급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지? 믿는다는 거야, 아니면 믿지 않는다는 거야?”

“둘 다 아니야.”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나는 소문 같은 건 내가 직접 겪거나 보았던 게 아니면 안 믿는 편이거든.”

“뭐 요컨대 쉽게 말하면 경험주의라는 거네?”

“뭐, 그렇게 생각하자면 그렇겠지.”

“그럼 진짜로 그 소문의 주인공을 실제로 경험해보니 어때? 정말로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대로인 것 같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왜?”

“아직 만난 지 몇 분밖에 안됐잖아.”

“뭐? 하하하!”

 

그는 갑자기 내 말이 무척이나 재밌었는지 웃음을 푹 터뜨렸다.

 

“사실 그렇지.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구나. 너는...”

 

그때 점심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지는 바람에 그는 하려던 말을 미처 다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곧 있으면 수업시간이야. 우리 가야될 것 같아.”

“난 안 가.”

“왜?”

“내가 가면 선생들도 싫어할 걸. 안 가는 게 피차 좋은 일이야.”

“그럼 너는 맨날 수업 안 들어가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그래도 퇴학 안 당해?”

“맨날 안 들어가는 건 아니야.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안 들어가는 것뿐이야.”

“뭐야, 날씨가 좋아서 안 들어간다니... 그렇게 안 보였는데 너 완전 날라리구나.”

“모범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라리도 아니야. 그나저나 너 수업 빨리 들어가야 될 걸. 5분밖에 안 남았다.”

“헉, 벌써? 빨리 가야겠다!”

 

나는 후닥닥 뒤돌아서 교실로 뛰어가려다가 휙 뒤돌아 말했다.

 

“너 여기서 자주 이러고 있어?”

“맨날은 아니지만 자주 여기 있지.”

“그럼 가끔 찾아와도 돼?”

“왜?”

 

그가 약간 이해가 안 된다는 것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나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뭐가 궁금한 건데?”

“그냥, 별거 아니야.”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애들이 말하는 대로 진짜 이상한 애인지 아닌지를 내가 직접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는 나를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잠시간 빤히 쳐다보더니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기분 나쁘다는 듯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웃는 거니?”

“이상한 애는 다름 아닌 너인 것 같아서 말이야.”

“뭐라고?”

“뭐, 너 좋을 대로 해. 내가 성당 전세 낸 것도 아니고.”

“정말이지?”

“그래.”

“좋아, 그럼 됐어!”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황급히 뒤돌아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는 아마도 나를 예전에 만났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기억하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왠지 모르게 그 때 그 일은 바보 같아서 부끄러웠으니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그 후로 심심하면 성당에 찾아가는 것이 나의 학교에서의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남자애를 몇 번 더 만나게 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꽤나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그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성준이었다. 처음에 어쩐지 모르게 차갑게 보였던 인상과는 달리 말을 나눠보면 볼수록 마음이 따스한 면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예컨대 그는 길을 걷다가 배고파 보이는 유기견이라든지 아기고양이가 있으면 먹을 것을 주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약한 아이들이 괴롭힘을 받거나하는 상황도 그냥 참고 넘어가지 못했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그는 약한 것들이 강한 것들에게 짓밟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성준이 학교에서 별의별 사고(사실 그게 사고라고 할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를 치고도 혼나지 않는 이유도 알게 되었는데, 성준의 외삼촌이 혁명의 주역 중 하나였던 것이었다. 나도 그 이름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선생들이 건드리지 못할 수밖에. 군부정권에서 장군의 조카를 함부로 건드리기라도 하면 바로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나는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선생들과 그렇게 말다툼을 벌였는가 하는 것들 말이었다.

 

“저번에 J시에서 몇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들었어.”

 

그의 곁에 앉아있던 내가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그랬던 거야?”

“나는 그냥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을 말했을 뿐인걸.”

 

성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경험했다니? 그럼 네가 그 사건 때 거기 있었다는 거야?”

“나 어렸을 때는 J시에서 살았거든.”

“그럼 그 사건을 직접 겪은 거야?”

“그래, 직접 겪었지.”

 

성준의 표정이 갑자기 한없이 어두워졌다.

 

“내 바로 옆에서 부모님이 모두 군인들의 총에 맞아 돌아가시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봤거든”

“오, 미안해.”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얘기를 꺼냈구나, 정말 미안해.”

“아니야, 뭐. 이미 오래 지난 일인걸.”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성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군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그 반란이 일어난 후에, J시의 시민들 또한 다른 도시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시위에 앞장섰어. 어수선한 시국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해.”

“반란이라니, 선생님들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다닌 거야?”

“못할 게 뭐야. 어쨌건 간에 군인들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했으니까,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가득 차있던 시민들을 총칼과 군화로 짓밟았으니까, 그건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혁명이 아니라 반란에 불과한 거잖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게 틀리다는 게 아니야. 그냥 그걸 생각하는 것과 직접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다른 일이잖아.”

“뭐가 다르다는 건데?”

“음,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거야.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 겁쟁이들은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못해.”

 

성준은 딱 잘라 말했다.

 

“더 약한 사람들에게만 고상한 척 훈계를 할 수 있는 하이에나 같은 인간들이거든.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결국엔 내 삼촌이라는 작자가 두려워서 내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해. 그들에게는 양심도 신념도 중요하지 않아. 그냥 당장 오늘의 안위만 중요할 뿐이지. 밥만 주면 좋다고 꼬리를 흔드는 개돼지마냥 말이야. 그리고 만약 삼촌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선생들에게 지금이랑 똑같이 말했을 거야. 혁명이라는 건 군사반란에 불과하고 J시에서의 사건은 폭동을 진압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학살에 불과했다고.”

 

이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성준의 눈동자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이 분노를 가득 띠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성준은 잠시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을 응시하다 이야기를 계속했다.

 

“몇 년 전 그날, 내 부모님은 길을 지나가다가 군인들의 총에 맞아 사망했어. 사람들이 떠드는 대로 반란을 일으킨 폭도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거리를 지나가시던 중이었지. 얼마 안 있으면 내 생일이었으니까 옷을 같이 고르러 말이야.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생생하게 기억나. 시내에 들어섰을 때 ‘독재정권, 반란군은 물러나라’고 써진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있던 시민들이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었어. 군인들은 귀가 멍멍할 정도로 커다랗게 확성기로 소리치고 있었지. 하지만 시민들은 물러나지 않았고 시위는 더 격렬해졌지. 확성기 소리는 더 시끄러워졌고 양쪽에서 고함소리가 오갔어. 우리는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사방에서 사람들이 더 몰려드는 통에 그럴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때 군인들이 발포를 시작했지.”

“발포라니,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총을 쐈다는 거야?”

“그래, 그건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어. 일순간 내가 서있던 곳 근처는 생지옥으로 변해버렸지. 여기저기서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어. 앞에서부터 뒤로 도망쳐오다가 총에 맞고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사람들,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뒤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쓰러진 동료를 구해주려다 같이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 엄마는 나를 구하려고 나를 감싸 안다가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아빠도 엄마를 구하려다가 돌아가셨지. 그때부터 나는 모든 것을 잃었어. 한동안 거리를 거지같이 전전하던 나는 그 빌어먹을 반란에 가담한 공모자 중 하나인 외삼촌에게 발견되어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야.”

 

별안간 성준은 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도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나를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라니?”

“그러니까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이야.”

“절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비록 내가 직접 겪진 않았지만, 네 눈동자를 보면 느낄 수 있어.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걸. 그리고 사실 군인들이 하는 소리들 대부분이 거짓이라는 건 나도 알아. 사실 누구라도 알고 있을 걸.”

 

마지막 말은 아빠를 떠올리면서 한 얘기였다. 우리 아빠도 너의 삼촌같이 그 반란에 가담한 군인이라고 그에게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왠지 모르게 그가 나를 싫어할 것만 같은 불안감과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성준은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굳이 더 묻지는 않았다.

 

“누구라도 알 수 있다니, 정말 그러면 좋을 텐데.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욕만 해대고 있지. 나도 알아, 주위에서 나를 보고 뭐라고 생각하는지. 첩자라느니, 불길한 눈동자라느니. 공감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저 나를 혐오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 애들에게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도 안 돼.”

 

내가 말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너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야속해. 어째서 그러는 걸까? 몰라서 그러는 걸까?”

“알아서 그러든 몰라서 그러든 그런 건 상관없어. 그냥 이유는 간단해. 결국에는,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 외에는 공감하지 못하니까. 그것뿐이야.”

 

성준의 말을 듣고서 내가 느낀 감정은, 결국에는 나도 그의 아픔을 완전히 공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랬다. 어쨌거나 나도 그와 같은 아픔을 겪은 적이 없으니까, 그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아이의 상처를 공감해주고 싶었고 감싸주고 싶었다. 비록 그게 조금이라도, 일부가 될지라도 말이었다.

 

“그래도 너무 그렇게 무리하지는 마. 성준이 너까지 다칠 수도 있잖아.”

“그런 건 감수하고 있어.”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뭘?”

“네가 전단지 같은 걸 붙이고 다닌다는 말도 들었어. 그러다가 정말 잡혀서 큰일 나게 될지도 모르잖아. 내 말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어쩔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음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이 무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거야. 우린 그냥 학생이고 그 사람들은...“

“그때 그 자리에서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군인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겠지. 어쩔 수 없었다며 말이야.”

 

내 말을 끊은 그의 싸늘한 한마디가 마치 내 가슴속에 비수를 꽂아 넣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이럴 수밖에 없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총을 쐈을 거야.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까. 그냥 폭도라면서 쏘라니까. 그렇게 합리화를 하면서 시민들을 향해 총을 갈겼겠지. 하지만 그렇게 쏜 총알 하나하나에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이 쓰러져갔어. 만약에 그때 그 사람들이 그 힘에 굴복하지 않고 반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우리 부모님은 지금까지 살아계셨겠지. 내게 다른 부모님들처럼 한없이 잔소리를 하셨을 테고 나는 늘 그걸 귀찮아하면서 평범하게 살았겠지.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말이야.”

 

나는 그의 회한에 가득 젖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왜 그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보였는지, 나의 호기심을 그토록 자극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없이 깊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상실감. 그것이 마치 나와 조금 닮았다고 느꼈다. 어쩌면 이 아이라면 나를 조금이나마 공감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옳지 못한 힘에 절대 굴복할 수가 없는 거야. 내가 그날 그곳에서 살아남았을 때부터 내게는 쭉 죄책감이 함께해왔어.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말이야..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해왔어.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건 다른 사람을 위한 게 아니야. 나 자신을 위한 거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그 죄책감이라는 망령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무언가가 조금이라도 바뀔 거라고 생각해. 그것뿐이야.”

 

그가 말을 마친 뒤에도 내가 한동안 성준의 얼굴을 말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는 무안한 듯이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너무 한심한 얘기만 많이 했나?”

“아니야.”

 

나는 곧바로 고개를 완강하게 가로저었다.

 

“전혀 한심하지 않아. 난 오히려 멋있게 보였는걸.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사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늘 도망치기만 하거든.”

아빠와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따지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하고, 늘 피하거나 도망치려고 했던, 때로는 그저 합리화를 하며 순응하려고만 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무엇이 옳은지 뭐가 가야되는 일인지 알지 못하고 가는 사람들보다 내가 더 나쁘다고 생각해. 나는 무엇이 옳은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느끼면서도 늘 도망치고 싶어 하거든. 그런 내 모습이 항상 너무나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만 했어. 그런데 너는 나와는 다르게 불의에 화낼 줄 알고, 문제를 피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으려 하잖아. 맞서 싸우려고 노력하잖아. 나는 그런 네 모습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

 

성준은 내 말이 무척이나 민망했는지 한동안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랐다. 나도 내가 이렇게 낯 뜨거운 말을 하게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어쩌면 오늘 어쩔 수 없다며 언제나 도망치기만 하는 나 자신에게 하는 변명에 대한 답을 그가 대신 해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약간 당황한 성준의 모습을 바라보며 살며시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있잖아. 나는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네 눈동자가 정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

 

 

그로부터 몇 달이 더 지났다.

어느덧 우리 둘은 사귀는지 안 사귀는지 모를 정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성준과 나는 정말 서로 생각이 잘 맞았다. 자연스럽게 꽤나 많은 시간 동안 우리는 함께 다녔고, 사람들은 그와 친하게 지내는 나와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내게 있어서도 그에게 있어서도 타인에 불과했으니까.

성준은 가슴속에 깊은 상처가 있는 아이였고 나는 그런 그를 지켜주고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었다.

그에게 동정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런 그의 모습에서 나와 닮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상처가 나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과는 공감할 수 없었던 일도 그와는 공감할 수 있었고 그럴 때면 더 이상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어쩌면 어릴 적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어나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피아노를 누구한테 배운 거야?”

 

문득 그날도 성당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여전히 피아노를 치며 답했다.

 

“엄마한테 배웠어.”

“엄마가 피아노를 잘 치셨나 보네.”

“엄마가 피아니스트였거든. 콩쿠르에서 입상도 많이 했대. 그래서 어릴 적에 어깨너머로 많이 보면서 따라 배웠지.”

“진짜? 신기하다. 그러면 피아노 칠 때마다 엄마 생각이 많이 나겠네.”

“뭐 그렇지.”

 

성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연주하던 곡을 바꾸었다. 나는 그 곡이 무슨 곡인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성당에서 성준을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연주하던 곡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서 조용히 곡을 감상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되게 좋다.”

“엄마가 내가 어릴 적에 줄곧 내게 들려주시고는 했던 곡이야.”

 

나는 다시 눈을 살며시 뜨고서 연주를 하고 있는 성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성준은 연주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의 손가락들이 건반 위를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문득 오래전에 들었던 아련한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저기, 조금 뜬금없는 소리 같기는 한데 그런 말 들어봤어?”

“무슨 말?”

“저기 하늘 너머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걸. 착하게 산 사람들은 죽어서 하늘 위에 숨겨져 있는 나라로 간대. 그 하늘위에서, 여기서 일어나는 여러 소식을 듣기도 하고 우리를 지켜보기도 한 대.”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잖아.”

 

성준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듯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천국이라니 실제로 그런 건 없어.”

“아니야, 있어!”

 

나도 모르게 화가 난 나머지 힐난하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내 의외의 반응에 놀란 듯이 연주를 멈추고서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어떻게 알아?”

 

나는 그에게 어릴 적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와 했던 약속, 그리고 내가 몹시 아팠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또 그 때문에 가수가 될 꿈을 가지게 된 이야기도.

 

“난 분명히 들었단 말이야. 내가 아플 때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그러고 나서 정말 씻은 듯이 아픈 게 모두 나았단 말이야.”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신기하네.”

“그렇지? 그러니까...”

“만약에.”

그가 갑자기 내 말을 끊었다.

 

“정말로 하늘나라가 있다면, 그래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볼 수 있고, 이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 부모님도 나를 보고 계실까? 내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그곳에까지 닿을까?”

 

나를 바라보는 성준의 표정은 조금 간절해보였다. 마치 그렇다고 답을 듣기라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럴 거야.”

 

잠시간 고민에 빠진 듯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성준은 이내 내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리며 말했다.

 

“은서 너, 비행기에 대해 들어봤어?”

“응, 들어봤지.”

“인간이 만든 기계가 하늘을 날 수 있다니 대단하지 않니? 몇 년 전 처음 발명되었을 때랑은 다르게, 지금은 개량이 많이 되었대. 꽤나 먼 거리를, 오랫동안 날아다닐 수 있나봐.”

 

성준은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는 듯 창가를 바라보았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던 누군가가 하늘나라를 봤을까?”

“음, 글쎄... 아직 아니지 않을까? 만약에 봤다면 신문에 소식이 실렸을 거야. 라디오에서도 들렸을 거고. 아마 꼭꼭 숨겨져 있어서 아직 못 찾았을 거야.”

“그렇겠지, 아직 못 찾았겠지.”

 

그 말을 하는 성준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게 느껴졌다. 별안간 그는 고개를 다시 내게 홱 돌리더니 물었다.

 

“은서 너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지?”

“응.”

”사실 내 꿈은 비행사가 되는 거야.“

”비행사라면, 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응, 그래.“

”와, 나는 비행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 해봤는데. 그거 엄청 되기 힘든 거 아니야? 왜 비행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거야?“

”글쎄, 예전부터 생각해왔어. 어릴 적부터 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생각한 게 있어. 저 위에 올라가게 되면 너무나 자유로울 거 같은데. 이 땅 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새처럼 하늘을 날게 된다면, 구름 사이를 비행하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감정들과 굴레들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 별 뜻은 없어. 그냥 누구보다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생각뿐이야. 어때, 시시하지?“

”아니, 하나도 안 시시해. 난 되게 멋있다고 생각하는 걸.“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갑자기 나도 궁금해졌어. 하늘위에 올라가게 되면 어떤 느낌일까? 되게 무섭지 않을까? 있잖아, 높은 데에 올라가서 아래를 보게 되면 너무 무섭잖아. 그러니까 고소공포증 말이야.”

“글쎄, 잘 모르겠어. 사실 나도 전혀 가보지 않았으니까. 아마 조금은 무섭겠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미있을 거야. 아름답기도 할 테고 설레기도 하겠지.”

 

문득 나는 성준에게 물었다.

 

“있잖아, 그러면 혹시 그때까지 우리 아직 친구면 나도 태워줄래?”

“태워주다니? 비행기를?”

“응,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을 여럿 태우는 비행기가 개발될지 모르잖아. 그럼 네가 나를 태우고 비행하는 거야. 나는 뒷자리에 앉아서 하늘나라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유심히 찾아볼게. 어때?”

 

그는 잠시간 나를 뻔히 바라보더니 이내 뭐가 재밌는지 하하 웃어댔다. 나는 왠지 모르게 뾰로통해져서 물었다.

 

“왜, 왜 웃어?”

“아니 그냥 네가 말하는 게 재밌잖아. 좋아 알았어, 그럴게.”

“좋아, 그럼 약속하는 거다.“

 

나는 약속을 의미하며 성준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성준이도 꼭 새끼손가락을 걸어주었다. 그때 그가 지어보인 미소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그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보게 된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

 

 

시간이 흘러 우리는 수험반이 되었고, 어느덧 입시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공부에 열중했다. 특히나 비행기 조종사를 육성하기 위해서 신설된 항공대에 가려면 점수가 매우 높아야했기 때문에 성준은 나보다 훨씬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했다. 나는 아빠의 반대를 무시하고 음대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성준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은 덕분이었다. 등록금을 내주지 못한다고 하면 내가 일을 해서 등록금을 벌 것이고, 만약 나를 집밖으로 쫓아내려고 한다면 그럴 예정이었다. 물론 진짜로 쫓아내지는 않았겠지만.

 

우리는 수업이 끝난 방과 후에도 아무도 없는 교실에 둘이 앉아 공부를 하며 서로 모르는 것들을 알려주고는 했다. 서로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는 했지만 실상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성준이 내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형식이었다. 그날은 마치 비가 올 것처럼 날이 조금 어두컴컴했고, 우리는 여느 날과 같이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성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자 성준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요새 잠을 제대로 못자는 탓인지 피곤이 역력해보였다. 나 또한 마음이 뒤숭숭한 나머지 공부가 하나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람도 쐴 겸 조금 쉬러 나가자고 말을 꺼냈고 그는 알았다며 책을 덮고 밖으로 나섰다. 중앙현관을 나서자마자 얼굴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빗방울이었다.

 

우산이 없었기에 우리는 할 수 없이 비가 떨어지지 않는 현관 계단에 걸터앉아 바깥을 바라보았다. 비가 점점 더 내리기 시작했다. 교정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한동안 옆에 앉아 비가 내리는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우우웅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비행기 몇 대가 하늘 위로 지나갔다. 우리는 그 모습을 고개를 들어 잠시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는 그것들이 마치 자유롭게 어딘가로 날아가는 새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 위에 하얀 궤적을 그리며 한참동안 날아가던 비행기들이 사라진 후에야 성준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전쟁이 날지도 모른대. 들었어?“

”응.“

 

나는 흔한 이웃집의 소식을 들은 것 마냥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던 까닭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신문이라든지 라디오에서 들리는 소식은 모두 불길한 소식들뿐이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들, 아니면 그와 비슷한 이야기들. 거대한 프로펠러를 단 비행기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 위를 날아다녔고 소규모의 교전이 일어났단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만약에, 전쟁이 진짜로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나는 팔을 괴고서 혼잣말하듯이 물었다. 성준은 마치 남의 일인 것 같은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죽겠지.“

”얼마나?“

”글쎄.“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징집되고 있다고 들었어. 비상사태라서 말이야.“

”응, 그렇다고 들었어.“

”만약에 전쟁이 일어나면 성준이 너도 끌려가게 될까?“

”아마도 전쟁이 길어지면 징집될 나이가 될 테니까. 어쨌든 우리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성인이잖아.“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꼭 그래야하는 거야?“

”상황이 너무나도 안 좋아지면 결국엔 그래야만 하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모두가 나서서 싸우지 않고 도망치기만 한다면 결국에는 다 죽게 될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네가 가는 건 싫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성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를 좋아하니까’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우리 둘의 사이는 누가 보더라도 친구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성준은 지금껏 내게 이성적인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성준도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말로, 느낌으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친구 이상의 신호를 절대 보내지 않았고 항상 거리를 유지했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이 말이다. 성준과 만나고 나서 늘 느끼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언제나 머나먼 곳에 있는, 저 높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그러나 그 장소에 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나도 비참하고 힘들게 만들었다. 지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내가 아닌, 뭔가 그 너머에 있는 다른 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이 갑자기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왜 우는 거야?“

 

그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갑자기 나를 자극해서였을까?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보고 나는 갑자기 악이 받쳐 올라서 울먹이며 말했다.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뭐?“

 

한동안 정적이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간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성준은 이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좋아해.“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고작 한 마디에 나는 바보같이 얼굴이 한 없이 상기되었다.

 

”나도 줄곧 고민해왔어. 나도 너를 정말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만 난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 말을 하는 성준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무척이나 쓸쓸해보였다.

 

”넌 정말 순수한 애지만 난 그렇지 못하거든. 결국 너한테 상처만 주게 될 거야. 너는 결국 내게 한없이 실망하게 되겠지. 그러니까...“

”내가 순수한지 아닌지는 네가 어떻게 아는데? 서로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네가 대체 어떻게 아는데? 아직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서로 좋아하면, 사랑하면 마음이 가는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상처를 주게 될지 아닐지는 해봐야 아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도망치려고만 하는데! 나는 널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말을 이어나가려던 그때, 갑자기 성준의 따스한 입술이 나의 입술에 맞추어져 포개어졌다. 성준의 두 손은 나의 한껏 상기된 두 볼을 잡고 있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살며시 눈을 감았다. 한동안 우리는 그렇게 세상이 멈춘 듯이,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곳에 그렇게 멈추어있었다. 포개어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체온이 전해져오는 가운데 빗소리는 한없이 아득해져 갔고 그 때만큼은 그 순간이 영원할 줄로, 그렇게 생각했다.

 

 

#

 

 

우리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결국 우려했던 대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A국과의 계속되는 도발과 신경전 끝에 국경선 근처에서 벌어진 작은 교전 하나가 결국 커다란 전쟁으로 비화되었고 사태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전선에서의 교착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라디오에서는 연일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나왔다. 결국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사지가 멀쩡한 젊은 남자들은 모두 징집되어 전선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학생들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몸 조심히 잘 다녀와.”

 

전선으로 떠나는 기차가 출발하는 역 앞에서, 은서는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렇지만 애써 웃음 짓는 그녀의 입가는 어딘지 모르게 금방이라도 울음을 왈칵 터뜨릴 것만 같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은서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감싸 안았다. 떨리는 가녀린 어깨 사이로 그녀의 체온이 전해져왔다.

 

“그래. 잘 다녀올게.”

 

나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나 또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서 기차에 탑승하라고 재촉하는 장교의 고함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미처 다 나누지 못한 이별의 인사를 급히 마치고 기차로 뛰어가기 시작했고, 갑자기 은서가 나를 확 떠밀더니 다시 나를 껴안고 입술에 키스를 했다.

한동안의 열렬한 키스가 이어진 후에야 그녀는 나를 다시 놓아주더니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꼭 돌아와야 돼, 알았지?”

 

그녀는 약속을 꼭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눈빛으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에 마주 걸었고 그제야 그녀는 꼭 잡았던 손을 놓고 나를 보내주었다. 나는 손을 안타깝게 흔드는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고서, 증기를 뿜어대는 기차로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기차는 증기를 뿜으며 전선을 향해 우렁차게 달리기 시작했고, 어느덧 나를 태운 기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던 그녀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창가에서 바라본 바깥의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햇살을 받으며 쏜살같이 뒤로 지나가는 나무와 숲들, 그리고 마을들, 전선의 포화 속으로 달려가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너무나도 평온했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앞으로 내게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이게 될까. 전쟁은 언제 끝날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만약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녀의 미소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

 

은서를 처음 만났던 것은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신호등 앞에서였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처음 보았던 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줄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녀가 성당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던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부터 나는 그녀가 몇 달 전 신호등 앞에서 보았던 소녀인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날, 내가 처음 보았던 날의 그녀는 마치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 마냥 방황하는 눈빛으로 경고하는 듯 빨갛게 빛나고 있는 신호등 앞에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처음 내게 구해졌을 때 보았던 그녀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것은 뜻밖의 상황에 몹시 충격 받아서 놀라거나 구해져서 안도하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이 텅 비어있던 두 눈동자. 마치 그 모습이 예전의 나와 닮은 것처럼 느껴져서, 그 후로도 한참동안이나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내 눈빛 또한 그랬을 것이다. 부모님을 잃게 되고 나서, 부모님을 잃게 만든 원흉 중 하나인 혐오하는 삼촌 밑에서 하루하루 그저 살아가고만 있는 비참하고 혐오스러운 나 자신, 그런 내게 있어서 살아가는 의미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텅 빈 몸뚱어리를 억지로 끌고서 텅 빈 하루를 그저 살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살아가야하는 이유가 있었다. 돌아가야 하는 장소가 있었다.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창가에 팔을 기대어 바깥을 바라보고서, 여전히 햇살이 아름답게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고서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

 

항공대를 다녔던 탓인지 나는 일반병사가 아닌 비행기 조종사로 배정되어 급하게 훈련을 받게 되었다. 전황이 몹시 어려운 모양이었다. 숙련된 조종사들이 임무 수행 중 많이 다치거나 죽었다는 소식들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덕분에 나와 함께 차출된 동료들은 모두 풋내기임에도 불구하고 속성으로 얼마간 훈련을 받고 실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실전에 투입되기에 앞서 처음으로 연습비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론상으로만 교육을 받은 것과 실제 하늘을 날아보는 것은 정말이지 천지차이였다. 거대한 프로펠러가 돌아가며 활주로 위를 달리던 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활주로 위로 날아올랐고,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눈 깜짝할 새에 어느새 나는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아래로 보이는 모든 것이 마치 허리를 굽히고 바라본 어릴 적의 장난감들처럼 작고 머나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하늘 위를 처음 비행하게 되고 나서 알게 된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살고는 했던 땅위의 세계,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고 미워했던 모든 사람들이 살았던 그 세계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얄궂게도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하늘 그 자체는 텅 빈 공간과 구름만이 가득한 세계였다. 그곳에는 구원 같은 것도, 그녀가 바라던 천국 같은 것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세계일뿐이었다. 은서도 이곳에 올라온다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실망을 할까? 아니 어쩌면 그녀라면 이곳에서 찾고자 했던 아름다움을 찾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건 그 즈음부터였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워. 너도 언젠가 나와 같이 날 수 있다면, 나와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거짓말로 편지를 쓰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아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애타게 기다리며 편지를 읽는 그녀의 눈에서 나를 걱정하는 눈물이 떨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편지를 읽는 동안에라도 안심하며 웃을 수 있다면, 이런 거짓말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나와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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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료들과 함께 실전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개의 작전수행방식은, 내가 조종하는 기체 주위를 몇 기의 전투기가 호위하고 나는 적진 한가운데로 침투해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방식이었다.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구름 위로 날아서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폭탄을 투하한다. 그것은 놀랄 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목표지점으로 날아가서, 그저 조종간에 있는 버튼 몇 개를 누르기만 하면 폭탄이 떨어진다. 그러고 나면 잠시 후에 지면에서 일어나는 작은 폭발이 보이게 된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볼 때에는 작은 폭발이지만 사실은 꽤나 큰 폭발일 것이다.

 

폭발음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고서 그저 들리는 것은 비행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프로펠러뿐. 아래로 번쩍이는 섬광을 통해 폭탄이 제대로 터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분명히 내가 방금 떨어뜨린 폭탄으로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몇 명이 죽었을까? 한 명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수십 명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일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의 어머니, 동생, 아들, 애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손쉽게 내가 누른 버튼 하나에 땅위에서 숯검댕이가 되어서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무섭게 하는 점은 내가 한 일들에 대해서 실감조차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 칼로 사람을 죽였거나, 총으로 보이는 곳에서 사람을 죽였다면 좀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들의 얼굴을, 그들의 표정을 절대 잊지 못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어.’

 

순간적으로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었다. 조종간을 잡은 손이 갑자기 파르르 떨렸다.

그토록 듣기 싫어했던 말, 그토록 혐오했던 말이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도 결국 내가 혐오하던 그들과 한낱 다를 바 없는 나약하고, 추레하고 비참한 하나의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고 있었다.

 

조종석을 감싸고 있는 유리에 내 모습이 어렴풋이 비쳐보였다. 유리에 비쳐 보인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를 노려보고 있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초점조차 없는 차가운 퀭한 눈.

무거운 생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나는 바깥의 창공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환하게 빛나는 달빛이 구름을 비추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어릴 적에는 이곳에 오게 되면, 하늘에 오르게 되면 좀 더 다른, 무언가 아름다운 세계가 있을 줄 알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죄책감에서, 상실감에서, 분노에서, 슬픔에서 벗어날 줄 있을 줄로 그렇게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작전이 성공적이었는지 내 기체 옆을 비행하고 있는 호위기에서 복귀를 뜻하는 신호가 환하게 깜빡였다.

 

작전을 모두 완료하고 나서 부대에 복귀한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임무수행결과를 보고한 후에 취침하러 들어가기 전 샤워장에 들어갔다.

뜨거운 물줄기가 죄악을 거짓말처럼 씻겨 내리듯이, 지친 나의 몸 위로 끊임없이 쏟아진다.

증기 사이로 거울에 희미하게 비추어져 보이는 내 모습 속에서, 차가운 두 개의 눈동자가 나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살인자의 눈이었다.

그제야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하늘을 날게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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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은 나의 하루 일과 중에서 유일한 안식이자 행복인 동시에 가장 비참한 시간이었다. 편지를 쓰며 그녀의 미소를 떠올릴 때마다 어쩌면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에 부풀고는 했다. 하지만 다시금 거울 속에서 차가운 나의 눈동자를 보게 될 때면,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으며 비참해져만 갔다. 이제 다시 그녀와 같은 공간에 서있을 수 없다는 것.

 

그녀는 나를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믿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어쩌면 그녀의 기대에 조금이나마 부합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가 알던 사람으로 남을 수 없었고, 그녀와의 약속처럼... 그녀를 데려다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는 곳, 무언가 아름다운 곳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때면, 한없이 슬퍼지고는 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것이 전선에서의 철칙이었고 말 그대로였다. 내가 죽이지 않는다면, 적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군이 패배한다면, 전쟁의 화마는 민간인들에게까지 퍼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은서에게까지. 내가 만들어낸 희생자들, 땅 위에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새까맣게 타서 나뒹굴고 있는 시체가 그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이곳에서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비행했고, 계속해서 사람을 죽여야만 했다.

 

이러한 생활에 무섭게도 익숙해질 때 즈음, 부대 내에서는 한 가지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바로 군 수뇌부에서 진행 중이던 비밀 프로젝트가 거의 완성되기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뒤 얼마 안 되어서 사령부로 불려간 나는 그 소문이 헛소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비밀 프로젝트는 실존했고, 군부의 모든 기술력과 예산을 쏟아 부은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바로 끔찍한 대량 살상 폭탄이었다.

 

충격을 받고서 고리 모양으로 터지는 플라즈마 폭탄이 반경 수km를 통째로 날려버릴 것이라고 그들은 내게 말했다. 그들이 내게 이 말을 들려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가 이 프로젝트의 끝을 장식할, 그러니까 폭탄을 싣고 적진으로 비행할 조종사로 선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임무수행도와 실적을 보고서 고심해서 선정했다며, 조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내게 말했다.

 

“적의 수도에 이 한 방을 제대로 떨어뜨릴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걸세. 이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자네의 손에 달려있네.”

 

그들은 내게 권유하듯이 말했지만 사실 내게 있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이 일을 거부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내가 아닌 다른 조종사가 이 일을 받아 수행할 것이다. 폭탄은 최대한의 인명피해를 내기 위해서 수직방향이 아닌 지평선 방향으로 넓게 퍼지도록 설계되었으므로, 높은 고도에서 떨어뜨린다면 내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무사하겠지만 대신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 죄 없는 민간인들이 말이다.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수뇌부의 결정이었으므로, 작전 수행이 이뤄지는 일시는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 나는 그때까지 컨디션 조절을 위해 특별히 휴식을 허가받았다.

 

작전에 관한 말을 들은 그날부터 나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잠을 깨고는 했다. 잠을 잘 때뿐만 아니라 밥을 먹을 때도, 운동을 할 때에도, 무엇을 하든지 끊임없는 번민이 나를 따라다녔다. 무엇이 올바른 선택일까? 확실히 적의 수도 한가운데에 그 폭탄이 떨어진다면 적은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을 것이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고 주요시설 및 정부고관들도 연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그들의 말대로 전황은 순식간에 이쪽으로 기울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표현대로 이렇게라도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앞으로 더 있을 희생의 총합에 비해 ‘싸게’ 먹힐지도 몰랐다. 분명히 앞으로 전쟁이 훨씬 더 길어진다면 그 폭탄으로 인해 죽게 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게 정말 최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지금 그들이 생각하는 일, 내가 수행하려는 일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일일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일일까?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며칠 간 계속된 고민 끝에 결국 작전수행일 전날이 되어서야 나는 마음을 굳혔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마치고 나는 그녀에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동이 틀 무렵 나는 편지를 다 썼고, 평소와 같이 편지함에 편지를 넣는 대신 믿을만한 동기 하나를 깨워서 그에게 편지를 부탁했다. 졸린 눈을 부비며 일어난 그는 갑자기 내가 부탁하는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내 표정을 보고서 더 이상 묻지 않고 이내 알았다고, 꼭 편지를 그녀에게 전해주기로 내게 약속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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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기상조건 악화로 이륙 시간은 늦은 밤이 되었다. 활주로에서 이륙을 뜻하는 깃발이 나부꼈고 그와 동시에 죽음을 실은 기체는 가볍게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지상에는 내가 사랑했고 미워했던 것들이 모두 있었고 그것들은 거짓말처럼 아득히 멀어져갔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전기에서는 계속해서 관제탑에서 전해져오는 세밀한 지시가 들려왔다. 항로를 실수로라도 이탈하지 않게 하거나, 혹시라도 모를 비상상황에 대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지금 내게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은서와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무심코 내게 단어 하나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있지, 혹시 그거 알아?’

‘뭔데?’

‘’Flight‘라는 단어가 비행이라는 뜻뿐만 아니라 도주라는 뜻도 있대. 몰랐지?’

 

원래부터 알고는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 말을 들을 때의 기분은 왠지 모르게 불쾌하고 언짢은 것이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말이 내 안에 있던 역린을 건드린 것이 아니었을까. 은서는 나를 분에 넘치도록 항상 좋게 봐주었다. 항상 불의에 맞서 싸우고, 도전하고, 비행하고 싶어 하는, 꿈을 가진 아이. 그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나였다. 하지만 실상의 나는 언제나 도망치기만 할 뿐이었다. 그 날의 학살 때도 나는 부모님의 시체를 남겨두고 정신이 나간 채로 거리를 뛰며 도망가기만 했다. 선생들과 아이들과 싸울 때도 그것은 어떤 정의감 같은 것에서 발현된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발버둥에 불과했다. 하늘을 날고 싶었던 것도 그냥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죄악들,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조차 나는 도망치고만 있었다.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인형처럼 도망치기만 하는 살인자. 결국에는 그녀가 말했던 대로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하고 믿는 나 자신이 결국에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깨달음이 가슴을 너무 아프게 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서 한 동안 거리를 두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런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조종간을 휙 끌어당겼다. 기체가 급상승을 하며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경로를 이탈한 것을 눈치 챘는지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무전기에서 계속해서 멈추라는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저 눈을 감았다. 이 폭탄은 땅 위에서 터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은서야, 이게 내 마지막 비행이 될 거야.’

 

나는 조종간을 있는 힘껏 끌어당겼고, 죽음을 실은 비행기는 계속해서 높디높은 하늘위로 날아올랐다. 급상승하는 탓에 기체가 끊임없이 요동쳤고, 위험을 알리는 붉은색 경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깜빡였지만 그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자유롭게 비행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날아올랐다.

숨이 가빠 멎을 때까지. 계속해서.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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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갑자기 성준에게서 편지가 잘 오지 않았다.

사실 편지의 내용은 언제나 늘 비슷했다.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슬프거나 힘들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 데도 말이다. 성준은 언제나 배려심이 깊었다. 그런 편지의 내용이 내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하는 것임을, 그리고 사실은 그가 누구보다도 힘들어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너무나도 좋았지만, 하지만 가끔씩은 그런 그도 내게 기대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힘듦을 토로하고 가끔은 내 앞에서 마음을 터놓고 눈물을 흘렸으면 하고 바랐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너무나도 힘들어 할 때면 나는 누구보다도 기쁘게 내 어깨를 내밀어 줄 수 있을 텐데... 그의 지친 등을 토닥여줄 수 있을 텐데.

 

그날 밤 나는 창가에 기대어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같이 이렇게 편지가 오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 밤이면 가끔씩 이렇게 나지막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는 했다.

혹시 지금 성준이도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들 때 갑자기 보랏빛의 섬광이 저 먼 하늘 위에서 고리 모양으로 퍼졌다.

보라색 빛의 고리가 완전히 퍼져나간 뒤에도 그 흔적은 공중에 남아 밤하늘을 잠시 동안 마치 낮과 같이 환하게 비추었고, 나는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압도되어 한동안 그 빛의 고리가 지나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그렇게 생각했다.

 

방금 그걸 성준이도 그걸 보았을까? 나와 함께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 물어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고,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이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추억을 회상하듯 빛이 지나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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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이상한 섬광이 비친 이후로 얼마 안 되어서 거짓말 같은 휴전으로 전쟁은 막을 내렸다. 소문에 들리는 바로 의하면 아군이 발명한 비밀병기에 지레 겁을 먹고 A국이 항복한 것이라고 했다. 전쟁이 마무리되고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일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잊기라도 하려는 듯이.

 

성준으로부터의 마지막 편지가 온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한 달쯤 지난 후였다.

성준의 각별한 동료였다며 우리 집에 찾아온 그 남자는 내게 편지 한 장을 전해주었다. 편지에는 그동안의 수많은 편지에는 적혀있지 않았던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나를 사실은 횡단보도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쭉 기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전쟁에서 겪었던 수많은 고뇌들. 내게로 돌아올 수 없다는 이야기. 끔찍한 대량살상폭탄을 떨어뜨리지 않고 자신이 처리하기로 결정한 이야기.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사랑한다는 이야기. 그동안 내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편지를 읽었을 때 얼마나 눈물이 떨어졌는지 모른다. 끝까지 바보 멍청이 같으니. 나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성준을 이상적인 사람이어서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다. 성준은 그가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내가 그에게 실망할까봐 두려워했던 모양이지만, 내가 그를 사랑했던 까닭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나와 닮아서,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고, 그가 나의 상처를 감싸주듯이 나도 그의 상처를 감싸주기를 원했다.

때로는 그에게 기대기를 바랐지만 그 또한 내게 가끔씩은 기대어주기를 바랐다. 내게 한 번쯤은 의지하고 울어주기를 바랐다. 상처를 스스럼없이 보여주기를 바랐다. 나는 사실 그가 나를 데리고 비행해주기보다는, 그냥 그가 옆에 있어주기를 더욱 간절히 바랐다. 그가 내게 그날 신호등 앞에서 삶을 되찾아주고, 내게 삶의 의미를 줬듯이 나도 그를 얽매고 있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내게 같이 비행하자고 약속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밝게 미소 지었으면 했다. 그가 얼마나 큰 아픔을 가지고 있든지, 얼마나 상처를 입었든지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저 보듬어주고 싶었다. 옆에서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의 말대로 성준의 아픔을 경험할 수 없었기에, 끝까지 그 아픔을 공감해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그렇게 자신이 받은 아픔을 그렇게 혼자서 모두 짊어지고 새처럼 머나먼 곳으로 날아갔다.

그를 상처 입히고 불구덩이 속에 들이밀었던 세상은 다시 이렇게 너무나도 평온한데, 어째서 그 혼자만 그렇게 상처를 받아야만 했을까. 그 사실이 나를 너무나도 아프게 했다. 그는 끝까지 피해자로 남았고, 가해자들은 아무데에도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지 2년 후에, 일어난 수십만 규모의 시위로 군부정권은 막을 내렸고, 아빠 또한 내란죄를 선고받아 실형을 선고받고 감방으로 가게 되었다. 많은 재산이 차압당했지만 다행히 예전부터 살던 집은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남은 건 그것뿐이었다. 유모도 아빠도 없이 나는 혼자 아무것도 없는 집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내 뒤를 봐주던 거대한 그늘, 아빠의 그늘이 없어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이에나처럼 발톱을 드러내었다. 숨죽여 살던 자들은 모두 민주투사가 되었다. 나는 그들에 의해 공범자가 되었고, 파렴치한 군부정권의 하수인이자 쓰레기 같은 창녀가 되었다.

그 많은 억압의 시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분노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들은 놀라울 만치 그렇게 갑자기 손가락질을 하며 나를 멸시하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집 앞에는 붉은 색의 페인트로 써진 혐오스러운 글자들이 하나씩 늘어갔다. 캠퍼스를 걸어갈 때도, 강의실에 들어갈 때도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때에는 대놓고 손가락질을 당하며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다. 나는 그대로 대학을 자퇴하고 거리의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더 이상 겁내지 않기로 했다. 사실 내게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홀가분했다.

 

그렇게 찾게 된 새로운 가족, 거리의 악단에서 나는 상실감을 잊고 내 삶을 다시 찾으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거짓말처럼 그렇게 살다보면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가 그 나름대로의 방법대로 죄책감을 잊으려고 했던 것처럼, 나는 나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옛 추억과 기억을 모두 잊으려고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 과거를 묻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악단의 일원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나는 그런 방식이 좋았다.

 

나는 그때부터 노래를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쭉 꿈꿔왔던 것처럼, 하늘 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나를 사랑해줬던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내게 어떤 추억으로 남겨졌는지는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 것을 세세하게 생각해내려 할 때마다 행복했던 기억과 아름다웠던 추억과 더불어서 아픈 기억들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상실감이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너무나 사랑했던, 그러나 지금은 곁에 없는 옛 연인이 보낸 편지를 꺼내서 읽어보고 싶지는 않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 편지를 읽게 되면 너무나도 많이 울게 될 테니까. 너무나도 아플 테니까. 미안할 테니까. 그리울 테니까. 그저 내게는 그런 편지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족했다.

 

그렇게 몇 년이 더 흘렀다. 다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잊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노력했고, 실제로 거의 그렇게 되었다. 오늘 다시, 공연을 위해 내가 어릴 적 살던 이 도시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은서 씨 오늘 공연 훌륭했어.”

“오늘따라 목소리가 정말 살아있던 걸.”“과찬이세요.”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모두 즐겁게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즐기고 있지만, 나는 사실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역에 내릴 때부터 거리의 풍경이 너무나도 예전과 변한 것이 없어서, 자꾸만 잊고 싶었던, 그리고 거의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옛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은서씨.”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그제야 나는 악단의 모든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내 옆에 앉아있던 단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은서씨 혹시 무슨 고민 있어?”

“네, 네?”

“아까부터 멍하니 있길래. 불러도 듣지도 못하고.”

“아니에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은서씨 예전에 여기 살았다고 했었지? 오랜만에 오니까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구나. 그럴 때는 생각만 하지 말고 한 번 집도 찾아가 봐야지. 어차피...”

 

단장은 말을 하다 말고 다시금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갑자기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은서씨?”

“잠깐, 갑자기 가야 할 데가 있어서요. 죄송해요.”

 

나는 그대로 약속에 늦은 것이 갑자기 기억나기라도 한 사람마냥 가게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바깥의 날씨는 마치 비가 오기라도 할 것처럼 온통 꾸물꾸물했다. 나는 그대로 한참동안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 같이 거리를 내달렸다. 그렇게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찾아간 곳은 내가 살던 집이었다.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비록 예전과는 다르게 먼지가 그득 쌓이고 거미줄이 온통 쳐져있었지만 본모습은 그대로였다. 집안을 온통 둘러보고서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먼지 속에 덮여있지만 집의 골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듯이 결국에는 내 추억도 완전히 잊힌 것이 아니라 두꺼운 먼지 속에 잠시 덮여있던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기억도 이 먼지들과 같이 오랜 시간 어렵게 덮여왔지만, 살짝만 불면 다시금 드러나 나를 아프게 할 것이다.

2층의 내 방부터 시작해서 집안을 한 군데씩 둘러보던 나는 신발장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까만 우산이었다. 내가 성준을 처음 만난 날에 그가 내게 씌워줬던 우산이었다. 내게 새 삶을 주었던, 그리고 행복을 주었던, 그리고 끝없는 슬픔과 그리움을 주고 간 남자가 남기고 간 우산. 그 이름을 다시금 떠올리자 오래 지난 일인데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 마냥 가슴이 저려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우산을 신발장에서 살며시 꺼내들었다.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지만 조금 털고 나자 마치 새것 같았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너무나 변한 게 없이 옛날 그대로라서 쓴웃음이 났다. 나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때 그날처럼,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걸음이 향하는 곳은 그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 신호등 앞이었다.

 

한참 동안 뛰다시피 걸어서 도착한 그곳 또한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도로 포장이 예전보다 더 잘되어있고, 주변의 건물 몇몇의 상호가 바뀌었다는 것 외에는 모두 같았다. 심지어 신호등도 예전과 같은 낡은 것 그대로였다.

 

얼마간 상념에 젖어 서있자 신호가 보행자 신호로 바뀌었고, 우산 위로 톡톡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 때문인지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전 이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나를 구해줬던 것처럼, 또다시 갑자기 나타나 나를 놀래 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 또한 부질없는 생각일 것이다.

 

생각을 떨쳐버리려 고개를 흔들고서 횡단보도를 반쯤 지나던 중,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나를 스쳐지나간 어떤 사람 때문이었다. 굉장히 낯익은 실루엣의 그 남자는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방금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붉은색 눈동자였다. 잠깐 동안 스치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숨이 가빠졌다. 게다가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빗소리 때문에 안 들리는 건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그 남자도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가슴이 쉴 새 없이 쿵쾅거렸다. 설렘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두렵다고 해서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도 이제는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

 

빗소리가 심장박동같이 점점 더 커져가는 가운데, 떨리는 가슴을 다잡고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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