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 병사 한 명이 귀순했다. 40여 발 총탄 속 군사분계선을 넘은 해당 병사의 나이는 25세, 이름은 오청성으로 알려졌다. 총격에 의한 내장 파열 등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부상 때문에 치료와 회복에 어려움이 있었고, 한때 온 국민의 관심이 그에게 모이기도 했다. 정전협정, 유엔 안보리 결의 등 민감한 정치·군사적 사안과 긴밀히 연결돼 있기도 해 역사책 한 면에 실릴 만 한 귀순이라 할 수 있겠다.

 

 북한을 탈출해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주민은 많으면 한 해 3,000여 명 정도이다. 하지만 지난달 귀순처럼 나라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북한의 고위 인사이거나, 뚜렷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거나, 혹은 군인의 귀순으로 무력 충돌 가능성을 빚는 경우가 몇 안 되는 예다. 휴전 이후 있었던 주요 귀순 사건은 다음과 같다. ▲조선 중앙 통신 부사장 이수근의 판문점 귀순 ▲북한 공군 조종사 이웅평의 MiG-19 귀순 ▲소련 관광안내원 바실리 마투조크의 판문점 망명 ▲김만철 일가의 해상 탈북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최고위 엘리트 황장엽의 망명 ▲2012년 노크 귀순(연도순) 각 사건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했다.

 

1. 1967년 이수근 북한 조선 중앙 통신 부사장이 판문점에서 귀순하다.

  3월 22일 오후 5시, 제242차 남북군사정전위원회가 끝났다. 이수근은 재빨리 UN군 대표 밴 크러프트 준장의 관용차량에 올랐고 150여 발에 이르는 북한 경비병의 총탄을 피해 자유세계의 품에 안착했다.

 당시 이수근은 귀순자 중 최고위급이어서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판문점에서의 긴박했던 총격전 이후 북한은 ‘미군이 이수근을 납치했다’며 송환을 요구했으나, 이수근의 자유의사에 따라 거부됐다. 이후 이수근은 우리 정보당국 등의 파격적 대우를 받으며 서울에 정착했다.

 

2. 1983년 이웅평 북한군 1비행사단 책임 비행사가 자신의 MiG-19를 타고 휴전선을 넘다.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 전투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2월 25일 오전 10시 58분경 서울과 경기, 인천에 대공 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북한군 1비행사단의 이웅평 상위가 MiG-19 전투기를 몰고 귀순해 온 것을 공습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군과 미국군은 팀스피릿 훈련 중이었다.

 1983년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과 중공 민항기 불시착 사건이 함께 있던 해이다. 사람들은 그 해를 ‘유독 공습경보가 많던 해’로 기억하는 듯하다. 이후 이웅평씨는 전투기의 가치에 해당하는 막대한 보상금을 받고 우리나라에 정착해 공군 장교로 임관했다.

 

3. 1984년 판문점 총격 사건 발생하다. (소련 관광안내원 바실리 마투조크의 망명)

  11월 23일 당시 소련(러시아) 국적의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가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갑자기 군사분계선을 넘어 망명했다. 북한군이 경고사격을 했지만 마투조크가 계속 남하하자, 군사분계선까지 넘어 사격했다. 유엔군이 대응하면서 30분 넘게 남북 간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 1명이 숨지고 미군 1명이 부상했다. 북한군 피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비병도 3명이 죽고 1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북한 김일성대 교환학생이었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마투조크의 망명 현장을 목격했다고 한다. 란코프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을 넘자마자 북한군의 총격이 시작됐다. 양측 모두 기관총이나 유탄발사기 등 중화기를 사용했다”라며 “북한군은 극심한 저항에 부딪히자 손을 들었고, 시신을 챙겨 군사분계선을 넘어 되돌아갔다”라고 말했다.

 

4. 1987년 김만철이 일가족과 함께 해상으로 탈북하다.

  북한 청진 의과대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했던 김만철씨는 1987년 1월 15일 새벽 어린 자식들과 장모, 처남, 처제까지 일가족 10명을 이끌고 북한을 탈출했다.

 엔진 고장으로 표류하다가 20일 일본에 도착,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다는 의사표명 했다. 그러나 한국, 북한, 일본의 외교적 마찰로 쉽게 해결될 기미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과 일본은 한국행의 우회적 대안으로 대만 경유를 선택했다. 이들은 2월 7일 새벽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에 도착, 다음 날인 8일 오후 김포공항에 안착,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5. 1997년 前 ‘조선노동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황장엽이 망명하다.

  2월 12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베이징의 한국총영사관에 찾아가 망명을 요청했다. 황장엽은 북한의 최고위급 엘리트로 주체사상의 철학적 기반을 다진 인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파장도 컸다. 이후 망명을 성사시키려는 우리 정부와 이를 막으려는 북한, 그리고 미국, 중국, 일본 등이 벌인 치열한 외교전 끝에 황장엽은 67일 만에 우리나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 뒤에도 황장엽은 암살 위협에 시달렸지만, 2010년 사망 때까지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일에 앞장섰다.

 

6. 2012년 북한군 병사 한 명이 동부전선(고성) 철책을 넘어 귀순하다.

  북한군 15사단 중위 이철호가 4월 27일 경기 파주의 최전방 경계초소까지 걸어와 귀순했다. 그는 철책을 넘은 뒤 속옷을 벗어 흔들고 우리 측 전방 초소 쪽으로 총까지 쐈지만 반응이 없자 GP까지 가서 “국군 장병”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이철호는 귀순 이후 방송에 출연해 북한 사회의 실태를 알리며 유명해졌다. 그는 북한군의 방첩 및 감찰기관인 보위사령부 장교 출신 중에 첫 번째 귀순자였고 북한군 내막은 물론 우리 군 방비태세의 허술함까지 속속들이 알아 큰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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